‘범죄도시2’가 지난 11일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2019년 봉준호의 ‘기생충’ 이후 3년 만이다. 코로나19로 침체한 극장가가 ‘범죄도시2’로 활력을 되찾았다.
‘범죄도시2’는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범죄영화다. 구체적으로는 범죄영화의 하위 장르라고 할 수 있는 경찰영화다. 경찰영화는 대개 경찰이 범죄자를 소탕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권선징악(勸善懲惡)이라는 단어를 이미지로 구현한 영화가 바로 경찰영화다.
경찰영화의 주인공은 당연히 경찰이다. 그런데 ‘범죄도시’ 시리즈에서는 많은 관객이 경찰 ‘마석도(마동석)’만큼이나 범죄자인 ‘장첸(윤계상)’과 ‘강해상(손석구)’에게 열광한다. 물론 그 이유는 윤계상과 손석구라는 배우 개인이 가진 매력과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연쇄 살인마를 연기한 배우에게 열광하는 건 이례적인 일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독립 큐레이터 천미림은 최근 민음사에서 출간한 인문잡지 ‘한편’ 8호에서 사람들이 범죄 콘텐츠에 열광하는 현상에 다소 비윤리적인 측면이 있다고 진단한다. 살인이나 폭행 행위를 보며 쾌감을 느끼는 것이 그다지 윤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폭력의 피해 당사자가 흉악한 범죄자라도 비윤리적인 것은 마찬가지다.
천미림은 철학자 애덤 모턴의 논의를 빌려와 잔인한 행위를 한 타인을 이해하려 할 때 인간이 빠지는 혼란에 주목하는 개념인 ‘악의 이해 불가능성’을 설명한다. 그는 ”(우리는)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연쇄 살인범을 대할 때 곧장 살인범의 쾌감을 상상하는 어려움에 빠진다”며 “그렇다면 관객으로서 범죄 콘텐츠를 즐긴다는 것은 살인범의 쾌감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 바꿔 말하면 그에게 공감하게 된다는 것일까?”라고 질문한다.
위 논의를 ‘범죄도시2’에 적용해보자. 강해상은 극악무도한 살인범이다. 그런데도 많은 관객이 강해상의 파괴적 행위에 환호하는 이유는 그가 관객의 억압된 욕망을 대신 해소해주기 때문이다. 사회의 규범과 질서를 뒤흔드는 연쇄 살인마의 잔혹한 행위에서 관객이 일종의 카타르시스(catharsis)를 느낀다는 말이다. 이는 귀신이나 괴물 등 초자연적인 존재가 등장하는 공포영화가 인기를 끄는 이유와도 비슷하다.
관객은 스크린 내부에서 펼쳐지는 비극적(혹은 불행한) 상황을 마주함으로써 마음에 쌓여 있던 우울과 불안을 해소하는 경향이 있다. 동시에 스크린 외부에 있는 자신의 위치에 안정감을 느낀다. 자신의 안위가 보장되는 자리에서 누군가의 불행을 지켜보는 일은 관음증적 측면에서 묘한 쾌감을 선사한다.
사실 이러한 논법은 마석도에게도 적용된다. 마석도는 마냥 선한 경찰이 아니다. 그는 베트남 출장길에서 우연히 강해상의 만행을 목격한 뒤 그를 검거하기 위해 베트남의 법과 질서를 무시한다. 베트남 경찰의 통제에 따르지 않고, 황야의 무법자처럼 행동하며 온갖 기물을 파손한다. 죄가 확정되지 않은 사람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패기도 한다. 그의 범법 행위는 연쇄 살인마를 잡는다는 당위성으로 전부 용인된다. 사회의 규범과 질서를 뒤흔드는 건 마석도나 강해상이나 마찬가지다.
천미림은 “범죄 콘텐츠의 비평은 감상자가 악인이나 악행에 몰입하게끔 하는 서사의 표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모턴은 작품에서 매력적으로 구현된 악마적 이미지가 감상자 내면의 은밀한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감상자가 범죄자에 이입하게끔 만든다”고 설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