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경아의 라온누리] 달력을 버리지 못하는 까닭

입력 2020-12-30 18:00 수정 2021-01-04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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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부 교열팀장

새해는 신축년(辛丑年) ‘하얀 소의 해’이다. 책상 위에 새해 달력을 세웠다. 모 기업에서 보내온 탁상용 달력인데, 특이하게 뒷면에 거울이 달려 있다. 마음이 느슨해질 때마다 거울을 보며 반성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다.

달력을 펼치고 시부모님 제삿날, 아버지 제삿날, 엄마 생일 등 집안의 기념일에 동그라미를 쳤다. 25주년이 될 결혼기념일엔 별 표시도 했다. 예·적금 만기일, 공과금 수납일까지 표시하고 나니 한 해 또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의욕이 솟는다.

하루 남은 올해의 달력을 훑었다. 지인에게 돈 빌려준 날짜, 그 돈과 함께 초콜릿을 받았다는 메모, 한글학회 등 우리말 관련 기관에서 청탁받은 원고 마감 날짜와 관계자 전화번호 등이 기록돼 있다. 잠시 눈을 감고 주마등같이 머릿속을 스치는 2020년의 추억들에 잠겼다. 여느 해처럼 2020년의 달력도 못 버리겠다.

종이가 귀하던 시절, 달력은 좋은 선물이었다. 내가 자란 산골 마을에선 시내에서 규모가 가장 큰 귀금속 가게나 안경점만이 달력을 만들어 단골손님에게 나눠 주었다. 음력 날짜와 띠별 운세까지 나온 일력(日曆)은 특히 인기가 높았다. 종이가 얇아 화장지로 쓰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열두 장짜리 긴 달력도 쓸 데가 참 많았다. 초저녁 간식으로 배추 부침개를 부칠 때면 채그릇 위에 달력의 하얀 뒷면을 깔았다. 기름이 스며들어 달력이 투명해지면 부침개는 바삭바삭 한결 맛있었다. 달력은 새 학년 교과서의 표지를 싸기에도 딱 십상이었다. 해 지난 달력이라도 버리면 큰일나는 줄 알았던 시절 이야기이다.

달력이 없다면 일상 생활이 무척 불편할 게다. 매년 이맘때면 시간의 흐름을 정의한 인간의 노력에 감사하는 이유이다. 시간을 측정한 첫 인류는 3만 년 전 달의 변화를 관찰한 크로마뇽인이다. 강의 규칙적 범람이 천체와 관련 있음을 깨달아 태양력을 만든 건 6000년 전 이집트인이다. 고대 중국인들은 12달짜리 태음력을 만들었다.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마야인들은 해와 달, 금성을 관찰해 1년을 260일로 하는 ‘트르킨’ 달력과 365일로 된 ‘하얍’ 달력 두 가지를 만들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달력은 로마 교황 그레고리 13세의 이름을 딴 그레고리우스력이다. 1895년 9월 9일 고종황제의 조칙에 따라 그해 음력 11월 17일을 1896년 1월 1일로 선포하면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1년을 정확히 365.2422일로 봤다. 양력의 기원으로 전 세계 많은 나라가 쓰고 있다. 시간의 흐름을 지배하려던 정치·종교권력에 맞선 과학자들의 오랜 투쟁 결과물로 ‘개혁의 달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달력이 개혁 속으로 들어왔다.

스마트폰만 열면 양력, 음력, 기념일이 다 뜨는 세상이다. 시대에 뒤떨어지게 웬 달력 타령이냐고 하는 이들이 있겠다. 세상이 빠르고 편리할수록 더 느리게 삶의 리듬을 타고 싶다. 그래야만 시간이 내 편이 되어 줄 것이다. 하루 남은 올해의 달력 앞에서 이해인 수녀의 ‘12월의 엽서’를 작게 읊어본다.

“또 한 해가 가 버린다고/한탄하며 우울해하기보다는/아직 남아있는 시간들을/고마워하는 마음을 지니게 해주십시오.//12월엔 묵은 달력을 떼어내고/새 달력을 준비하며/조용히 말하렵니다/‘가라, 옛날이여’/‘오라, 새날이여’/나를 키우는 데 모두가 필요한/고마운 시간들이여”

쌍둥이 송아지 ‘희망이’와 ‘소망이’가 모처럼 웃게 한다. 지난여름 섬진강 수해 때 전 국민의 가슴을 떨게 했던 지붕 위의 소가 쌍둥이의 어미다. 위기 속에서 태어난 자매 송아지가 건강하게 자라듯 우리도 코로나 위기를 잘 통과할 것이란 희망을 품어본다.

독자 여러분, 올 한 해 수고하셨습니다.

jsjy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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