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시장 속으로] 지배구조ㆍ책임투자 용어와 번역의 문제

입력 2020-02-17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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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준 대신지배구조연구소장

2020년 2월은 한국 영화사에 큰 획을 그은 기념비적인 달이다. 영화 ‘기생충’이 국내 최초로 아카데미에서 감독상, 작품상 등 주요 부문 4관왕에 등극했기 때문이다. 이미 지난해부터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200여 개의 상을 획득하며 이번 수상 가능성의 전주곡을 화려하게 울렸지만, 자국 영화의 점유율이 90%를 육박하는 미국시장에서도 최고의 영화로 인정받았다는 것만으로 모든 한국인들은 짜릿한 자존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영화는 전 세계적인 이슈인 빈부 격차에 대한 풍자, 감독이 직접 쓴 콘티, 군더더기 없는 대화, 계층 간의 격차를 ‘냄새’라는 상징으로 드러내는 절묘한 메타포 등으로 많은 화제를 낳았지만, 기업지배구조와 사회책임투자 일을 하는 필자에게는 더 크게 다가오는 다른 의미들이 있었다.

기생충이 받은 상 중에는 미국배우조합 상인 ‘앙상블상’이 있다.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기생충의 주인공은 누구냐?”고 한다. 출연한 배우들의 입장들이 다양한 데다 모두 충분한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민주적이다. 이는 필자에게는 “회사의 주인은 누구인가?”를 떠오르게 한다. 회사는 개념적으론 주주들의 소유이지만, 실제로 회사의 경영은 지배주주의 지배하에 있다. 그러나 회사는 지배주주보다 더 많은 수의 일반주주, 채권자, 직원, 고객, 경쟁사, 협력사, 지역사회, 정부 당국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존재한다. ‘오너(Owner)’라는 표현을 지양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회사는 어느 한 개인의 소유가 아니다. 다양한 이해관계자들이 서로 유기적인 ‘앙상블’을 이룰 때 험난한 자본생태계 속에서 계속 존속, 성장, 발전할 수 있다.

기생충이 받은 아카데미 ‘국제영화상’은 기존의 ‘외국어영화상’에서 이름을 바꾼 것이다. ‘미국 중심, 미국 영화들만의 잔치’라는 논란을 고려한 셈이다. 언어는 생각과 정서를 직접 불러일으킬 수 있는 하나의 ‘사물’이기 때문에, 어떻게 말하고 부르는지는 생각보다 매우 중요하다.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이후 국내 재계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용어 중에 ‘관여활동’(Engagement)이 있다. 기관투자자가 고객의 자금 관리자로서 이슈가 있는 기업에 대해 책임감을 가지고 활동하는 본연의 임무를 말한다. 하지만 ‘관여활동’이란 단어의 뜻만 보면, 투자자가 회사 경영에 개입해서 ‘간섭’하는 행동으로 비쳐질 수 있다. 기업 입장에서는 충분히 발끈할 만하고, 실제 이러한 오해로 엄청난 비판이 쏟아졌다. 하지만, 투자자의 Engagement는 주주권익 침해 가능성이 있거나 개선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등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 기업에 대해서만, 비공개 대화에서부터 서면 통지를 거쳐 주주제안을 하는 등 보통 일정한 ‘원칙과 공정한 절차’에 따른다. 이러한 연유로 최근에는 이를 ‘대화, 소통, 주주행동, 책임활동’ 등으로 다소 완화해 부르기도 한다.

사회책임투자를 의미하는 SRI(Social Responsibility Investment)도 어감이 주는 부정적인 인상으로 종종 불필요한 오해와 곤란을 겪는 용어 중 하나다. 특히 공적기관이나 연기금과 관련되면 Social이란 단어가 (연금)사회주의(Socialism)를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본래 공동선을 추구하는 취지와 달리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이념 논쟁에 휩싸이기 쉽다. 그런 연유로 유엔(UN) 같은 국제기구나 캐나다의 CPPIB와 같은 연기금들은 Social이란 말을 빼고 RI(Responsibility Investment)라는 용어만 쓰기도 한다.

하지만 필자가 이번 쾌거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큰 감동을 받은 것은 봉준호 감독의 당당하고 재치있는 인터뷰와 더불어 군더더기 없고 감칠맛이 돌 만큼 딱 떨어지는 역대급 통역이었다. ‘영화는 내용을 모르고 보러 가야 더 재미있다’를 “The film is best when you go into it cold”로, 수상 소감을 묻자 ‘(사람들이 뜨거운 반응을 보여줘서) 놀라우면서도,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를 “I was surprised, but at the same time I thought it was inevitable”로 옮기는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Cold와 Inevitable의 ‘맥락상의 적절함과 효율성’에 감탄해서다.

책임투자 업계에서 이러한 밀도와 무게감을 지니고 전 지구적으로도 가장 많이 쓰는 한 단어를 고르라면 단연 ‘Sustainable’다. 지난 100년간 사회 ’책임’의 차원에서 한 논의들은 이제는 더 이상 몇몇 선각자들의 의무가 아니며, 자본주의가 민주주의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최소한의 전제가 됐다. 이는 구성원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회’의 문제이며, 기업 ‘성장’의 필수 요소이고, 환경 문제의 경우 결국 인류 ‘생존’의 근간이 된다.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이란 말을 기억하자. 다양한 측면에서 자본주의의 문제들을 곱씹어 볼 수 있는 시대적 화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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