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img.etoday.co.kr/pto_db/2018/09/20180921100650_1252304_200_275.jpg)
필기구 세계에도 이런 역주행이 있다. 1963년 일본의 펜텔사(社)는 펜 끝이 섬유질인 ‘사인펜’을 내놓았지만, 국내에선 인기를 얻지 못해 매출이 형편없었다. 그런데 운 좋게도 이듬해 열린 시카고 문구 국제박람회에 출품 배포된 것 중 하나가 미국 백악관 직원의 손에 들어갔고, 우연히 당시 린든 존슨 대통령(1908~1973)이 써보고 24타스를 주문, 이의 영향으로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끌게 된다. 이후 사인펜은 더 확산되어 이런 유형의 다른 회사의 것들도 ‘사인펜’으로 부르게 됐다. 상품명 사인펜이 일반 명사화될 만큼 크게 성공한다.
약간 의미가 다르지만 필기구 세계에는 ‘늦깎이’도 있다. 늦깎이는 사전적 의미에서 나이가 꽤 들어 어떤 것을 시작하거나 성공한 사람을 뜻하는데, 몽블랑사(社) 149(1952년 출시)와 파이로트 캡리스(1963년 출시)가 바로 늦깎이 만년필이다. 공통점은 현재까지 생산되고 있는 장수 모델이며 출시되고 한참 지난 후 인기를 얻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둘은 차이점이 있다. 몽블랑 149가 전통을 고수한 반면, 파이로트 캡리스 세태(世態)를 잘 따랐다는 점이다. 당시는 새로운 필기구인 볼펜의 등장으로 만년필 매출이 바닥을 치고 있던 시기였다. 만년필 제조사들은 살아남기 위해 잉크병이 필요 없는 카트리지 방식을 선보이고, 펜의 크기도 휴대가 편하게 줄였다.
![▲뚜껑이 없는 파이로트 캡리스 만년필. 윗부분을 누르면 펜촉이 나오고 들어간다](https://img.etoday.co.kr/pto_db/2018/09/20180921100649_1252303_297_879.jpg)
여기에 캡리스(Capless)라는 이름이 캡이 없다는 뜻인 것처럼 볼펜처럼 뚜껑이 아예 없었다. 당시 유행하는 만년필의 유행과 볼펜의 장점까지 세태를 따라도 너무나 잘 따른 것이다. 이 캡리스는 성공했을까? 당시의 것은 밀폐가 좋지 않았고 내구가 떨어져 큰 인기는 끌 수 없었다. 결국 이 둘은 1950년대 파커51, 1960~1970년대엔 파커75의 인기에 밀려났다.
그러던 중 1980년대 만년필이 부활하면서 사람들은 다시 큰 만년필을 원하게 됐다. 몽블랑 149보다 크고 아름다운 만년필은 없었다. 늦깎이 149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또 다른 늦깎이인 캡리스 역시 1990년대 후반 인기를 끌기 시작했지만 몽블랑 149와는 다른 양상이었다. 149가 전통적 아름다움이 무기였다면, 캡리스는 수십 년간 밀폐 등 크고 작은 문제점을 끊임없이 보완하여 믿을 만한 품질로 완성시킨 것이 늦깎이 인기의 비결이었다. 다시 한번 느끼는 것이지만, 역주행이든 늦깎이이든 잘 만들어진 것은 언제고 반드시 빛나기 마련이란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