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뒤 우리는 한국군의 무용담, 주월사령관 채명신 장군의 슬기로운 지휘, ‘귀신 잡는 해병대’의 용명(勇名)을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다. 공산화를 막아야 한다는 역사적 사명감 속에서 한국군은 베트콩에 맞서 용감하게 싸웠다. 우리나라 5천년 역사상 첫 해외 파병된 그들은 6·25 때 유엔 연합군이 우리를 위해 싸워주었듯 월남을 위해 희생을 무릅썼다. 북부 월맹(越盟)은 북한 공산군처럼 타도해야 할 대상이었다.
게다가 파월 장병들이 목숨을 걸고 벌어들인 달러와, 월남 특수(特需)는 개인의 살림을 향상시키고 국부(國富) 증대에 기여했다. 한국 정부는 그들의 월급 가운데 80%는 고국의 가족에게 송금토록 했다.
하지만 빨갱이 소탕을 통한 자유민주주의 수호와 국가에 대한 기여로 자부심이 높았던 그들은 그 뒤 ‘정의롭지 못한 전쟁에 잘못된 파병’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역사에 오점을 찍은 사람들이 되고 말았다. 미국의 압력과 회유에 의해 결정된 파병의 본질은 용병(傭兵)이었다. 그런데 전쟁도 패배로 끝났다.
더욱이 미군에 의한 미라이 양민 학살사건은 전쟁 반대와 조기 종결 여론을 불러 반전 캠페인이 거세졌다. 한국군은 파병 기간에 4만여 명의 베트콩을 사살했다지만, 1966~1968년 맹호부대 청룡부대 등이 9000여 명의 양민을 학살한 죄과(罪科)가 있다. 그것은 범죄였다.
학살 지역 중 희생자가 135명인 하미마을에는 월남참전전우복지회가 세운 위령비가 있다. 그런데 이 단체는 학살 과정을 적은 비문의 내용을 지우도록 해 연꽃 모양의 대리석을 덧씌운 상태라고 한다. 은폐한다고 학살의 역사가 가려지나. 그 대리석 속에서는 위령(慰靈)의 마음이 아니라 증오와 분노가 자라고 있는지도 모른다.
베트남과의 수교 26주년을 맞은 이 시점에 과거를 돌아보면 한국은 베트남의 가해국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인도적 원조를 많이 하고, 학살 지역에 학교와 병원을 세웠지만 역사의 과오는 씻기지 않았다.
라이따이한(베트남전에 참전했던 한국인과 베트남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인) 문제는 여전히 심각하다. 최근에는 한국에 시집온 베트남 여성들의 수난과 범죄에 의한 희생이 잇따르고 있다. 이런데도 대한민국에 대해 ‘과거를 닫고 미래를 열자’는 자세로 접근하고 호응하는 베트남은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22일 베트남 방문을 앞두고 ‘이제 우리도 베트남 정부와 국민들에게 정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사과했으면 합니다’라는 청와대 국민청원의 참여자가 20일 현재 6000명을 넘었다. 문 대통령이 베트남 국민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무슨 메시지를 줄 것인지 궁금하다.
1970년 12월 7일 폴란드 바르샤바 국립묘지를 찾은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는 유대인 위령탑 앞에 무릎 꿇고 묵념했다. 언론은 “무릎을 꿇은 것은 한 사람이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고 평했다.
35년간 한국을 식민지배하고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후에는 6·25 특수로 덕을 보아 부흥의 기틀을 마련한 일본은 독일과 딴판이다. 사죄할 줄 모르는 그들은 역사를 부정한다. 그런 일본에 대해 우리가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우월한 국가가 되기 위해서라도 베트남에 사죄를 하는 게 좋겠다. 브란트처럼 하지 못할 게 뭐 있나. 베트남 사람들의 마음을 사야 한다. 이것은 역사에서 소외된 채 심신의 상처로 후유증을 겪는 파월 장병들에 대한 배려와 별개로 중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