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토론회에 참석했지만, 발제문을 발표하지 못한 토론회는 처음입니다.”
이달 10일 행사 시작 20분 만에 파행으로 끝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개정 관련 공청회에 대한 송기호 변호사의 총평이다.
세월호 참사 당일(2014년 4월 16일) 구조활동 문서 목록 공개와 일본군 위안부 합의 정보공개 청구 등 사회적으로 뜨거운 이슈가 부각될 때마다 그는 항상 중심에 서 있었다. 한·미 FTA 개정협상 절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달 13일 서울 가락동 수륜아시아법률사무소에서 ‘자유무역협정 저격수’로 불리는 송 변호사를 만났다.
그의 사무실 책상 위에 놓인 한·미 FTA 협정문 책자에는 10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손때 묻은 표지는 너덜거리고 빼곡하게 가득 적힌 각종 메모와 밑줄도 눈에 띄었다.
송 변호사는 기자에게 A4 용지 3장짜리 발제문을 내밀었다. 그는 10일 열린 한·미 FTA 개정 관련 공청회에서 종합토론 전문가 8명의 패널 중 한 사람이었다. 공청회 현장에는 50여 곳 언론사의 기자들이 있었지만, 이날 어느 누구도 그의 발표를 듣지 못했다. 공청회가 농민단체 등의 강력한 반발로 중단됐기 때문이다.
“(정부가) 이런 자세로 어떻게 농민들을 설득할 수 있겠습니까.”
송 변호사는 가장 먼저 통상 관료들의 ‘소통 부족’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그는 당일 산업통상자원부에서 만든 네 쪽짜리 공청회 자료집에는 시민들과 소통할 수 있는 내용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다며 정부가 객관적인 통계로 농민들을 설득해야만 소통이 이뤄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송 변호사는 “한·미 FTA 발효 이후 5년간 어떠한 성과가 있었고, 각 산업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이익 또는 피해가 있었다면 어느 정도인지 객관적인 평가 결과가 최소한 공청회 때 제출됐어야 했다”며 “한·미 FTA 개정협상은 5년간의 영향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 위에서 출발해야 국민적인 인식과 동의를 얻고 협상력도 높일 수 있다”고 힘주어 말했다.
송 변호사는 객관적인 평가 결과도 없이, 발표문도 토론자들에게 미리 공개하지 않은 공청회는 ‘요식행위’에 불과하다며 통상 관료들이 국민과의 소통을 강조하는 문재인 정부의 국정 철학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최근 더불어민주당에 입당한 송 변호사는 당내에 통상 특위를 구성해 국민과의 소통을 강화하고 절차적인 정당성을 확보할 것이라고 밝혔다. ‘밀실 협상’이 아닌 국민의 동의 속에서 개정협상을 진행하는 등 소통 방식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한·미 FTA가 ‘만능’은 아니다”라며, “한·미 FTA 협상을 이끌었던 통상 관료들은 문제점을 인식하는 데 소홀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송 변호사는 “2006년 상황과 10년이 지난 지금의 상황은 다르다”며 “경제민주화 요구가 강해졌고 수출 대기업 중심의 경제 운용에서 이제는 벗어나야 한다는 국민적인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무역 이익이 공유돼야 한다는 대원칙하에 새로운 한·미 FTA로 진화하고 발전해야 한다”고 했다.
그의 말대로 문재인 정부의 ‘사람 중심 경제’ 국정 철학을 담으려면 어떻게 개정해야 할까.
“문재인 정부의 국정 철학에 부합하도록 궤도를 수정하고 한·미 FTA의 추진 목표와 원칙을 재정립해야 합니다. 수출 기업의 경쟁력 강화 못지않게 고용 창출, 임금 인상 등을 통한 서민의 삶의 질 향상, 환경 보호와 노동권 보장 등도 매우 중요합니다.”
송 변호사는 “한·미 FTA는 미국의 반덤핑 보호무역주의 장벽에 무력했다”며 “중소기업 적합 업종의 실효적인 법제화를 가로막고, 저탄소 자동차 전면적 보조금 정책을 좌절시켰다”고 지적했다.
자동차의 고용 유발효과가 크기 때문에 FTA로 인해 자동차 조세 체계 등 자동차 산업 정책을 시행하지 못하는 상황은 수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트럼프 행정부도 스스로 폐기하겠다고 하는 투자자-국가소송제(ISD)는 폐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국 측은 국내법으로 다스려야 할 외국 기업 관련 환경, 노동 분쟁까지 국제 중재로 해결하도록 한·미 FTA에 못 박아 논란이 됐다. 최근에는 미국인 토지 소유자가 도시 재개발 사업의 수용 보상금액에 맞서 한·미 FTA 국제중재회부(ISD) 의향서 통지를 했다. 이에 대해 그는 “지금까지 수용보상금 문제는 전적으로 한국 법원의 관할이었으나, 이제 공익 사업 추진에 매우 중요한 보상금액 문제까지 ISD의 간섭을 받아야 한다”며 “토지 소유자가 단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한 개의 FTA가 사법주권을 쥐락펴락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꼬집었다.
서비스 시장 개방과 관련해 송 변호사는 보건, 의료, 교육, 주택, 운송 등 공공성은 더욱 강화하되, 법률 시장처럼 아직 기득권이 보호되는 부문의 개방 폭은 확대해야 한다고 했다.
“외국 로펌이 한국에서는 ‘49% 지분제한’으로 인해 경영을 주도할 수 있는 법률회사를 세울 수 없도록 돼 있습니다. 대외 개방의 폭이 굉장히 높음에도 기득권을 과도하게 보호하고 있는 부문은 전면 개방해 중소기업도 외국 법률 서비스를 더 쉽게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농축산업계에 대해 그는 농업 분야의 FTA 대책이 과연 효과가 있었는지 전면적인 평가를 실시해야 한다고 밝혔다. 대책으로서 효과가 있었다면 그 근거를 농민에게 제시하고 지속적인 농업 예산 지원을 국민에게 호소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국민은 농업 분야 투입 예산의 효용성을 정확하게 알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쌀은 레드라인”이라며 확고한 입장을 드러냈지만, 송 변호사는 이미 쌀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개방돼 있다고 설명했다.
송 변호사는 “쌀은 이미 513% 높은 관세율로 개방돼 있다”면서 “관세율이 높지만 세계무역기구(WTO) 협정으로 매년 약 40만 톤의 의무 수입 물량이 정해져 있다”고 말했다. 그는 국내 쌀 농업이 어떤 상황이든지 이와 무관하게 1년에 연간 쌀 소비량의 12%가량을 의무적으로 수입해야 하는 것 자체가 농업이 감당할 수 없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민주적인 ‘통상 거버넌스’에 대해서도 강조했다. FTA 평가는 경제성 평가만 가지고는 안 되며, 삶의 개선과 일자리·환경·인권의 문제로 넓게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럽연합(EU)처럼 ‘FTA 인권 영향 평가’를 도입하는 등 포괄적인 경제·사회적인 영향 평가를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정부와 민간을 아우르는 FTA 거버넌스 역할을 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송 변호사는 “트럼프 행정부에 쫓겨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도적으로 우리 스스로의 필요를 위해 하는 주체적인 개정협상이 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FTA 저격수’ 송기호 변호사는 누구
수륜아시아법률사무소의 송기호(54) 대표변호사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의 국제통상위원장을 맡고 있다.
전남 고흥군에서 태어나 1985년 서울대 무역학과를 졸업한 후 1987년 전남 해남과 나주, 영암 일대 농촌에서 5년간 농민운동을 했다. 고향 인근에서 농사를 지으며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의 전남지역 정책 실장을 지냈다. 이후 농민운동을 접고 잠시 은행원 생활을 하다가 뒤늦게 사법시험에 도전해 사법고시 40회에 합격했다. 변호사가 된 뒤 농업통상 분야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법률사무소를 차려 대표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2008년 미국 쇠고기 협상 때는 미국의 동물성 사료 금지 조처를 담은 미 식품의약청 보도자료를 정부가 정반대로 번역했다는 사실을 밝혀내기도 했다.
2006년 한·미 FTA 협상이 시작될 때부터 ISD의 위험성을 지적해 왔으며, 한·미 FTA 협정문 번역 오류까지 발견할 정도로 통상법에 정통한 통상 분야의 전문가다.
△서울대학교 무역학과 졸업 △University of Queensland 환경관리과정 이수 △국민은행 국제부 근무 △조선대학교 법학과 겸임 교수 △무역협회 무역아카데미 교수 △민변 국제통상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