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보수와 진보(1)

입력 2008-01-14 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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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혁명(1789)은 구체제(Ancien Regime)의 모순을 극복하지 못해 일어난 혁명이었다. 당시 프랑스 사회는 성직자(1신분), 귀족(2신분), 평민(3신분)으로 구성된 사회였다. 성직자와 귀족은 인구의 2%였고, 평민이 98%였다, 그런데 전국 토지의 80%를 이 2%가 소유하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은 토지를 사실상 장악한 성직자와 귀족들이 세금(토지세)을 한푼도 내지 않는 납세 불균형에서 출발했다. 토지의 20%만 갖고 있는 평민들이 세금을 몽땅 내야 하는 불만이 폭발한 것이 혁명의 도화선이었다.

혁명 전후에 성직자와 귀족은 기존 체제를 고수하려는 보수적 성향을 나타냈고, 농민과 노동자가 주축이 된 평민은 새로운 시대를 열려는 진보적 성향을 나타냈다. 구체제 붕괴를 내세운 평민 계층은 좌파적 성향을 보였다. 프랑스 혁명은 그래서 결국 좌파 혁명이 되었다.

그 이후 사람들은 보수는 으례 체제수호파로, 진보는 혁명또는 개혁파라고 불렀다. 그러나 실제는 특히 오늘날 보수가 체제의 정통성이나 정당성 없이 무조건 체제의 수호를 주장하지 않는다. 보수 역시 시대적 상황에 맞게 변화를 적극 추구한다. 마찬가지로 진보 역시 개혁을 지향하지만 좌파적 사회 전복을 추구하지 않는다.

몇 년 전 송년회 모임에서 일어난 일이다. 모임이 끝난 뒤 모두들 삼삼오오로 2차로 한모금하러 갔다. 재수 없는 날이라 그런지 그 자리에 첨보는 한 40대 중년이 취한 상태서 정치발언을 마구 내뱉었다. 말씨가 점점 강경해지더니 나중에는 듣기에 매우 거북한 말까지 했다. “수구꼴통들은 다 뒈져야 해. 좌파 정권은 김대중•노무현에 이어 30년은 할거야. 그 때가 되면 대한민국은 사회주의공화국이 돼있을 거고 말이야......”

누구나 사상의 자유는 법률에 위배되지 않는 한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처럼 일방적인 주장을 공개장소에서 해대는 건 정말 짜증스런 일이다. 세상 이치 모르고 잘난 척 하는 그 사람이 불쌍하기도 하고 무식하게 보여서 맘이 편찮았다.

우리 사회는 40년대 해방 이후 겪었던 좌우 이념대립을 지난 10년 동안 또 한번 경험하고 있다. 이 시기를 우리 현대사의 제2차 이념갈등 기간이라 칭할 수 있겠다. 이 기간 중 나타난 가장 뚜렷한 사회 현상은 과연 무엇이 보수고 무엇이 진보인지를 알지 못한 채 서로 상대방을 공격하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그냥 막연한 생각으로 기득권은 보수요, 반정부나 민주화 운동하면 진보로 여겼다. 그러나 보수층으로 대변되는 기득권층에는 자신의 사익만을 추구하는 수구파가 숨어있었다. 민주화 투사로 상징화되는 진보계층에는 좌익 및 김일성주의자들이 그 속에서 준동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진정한 보수고, 무엇이 진정한 진보란 말인가. 보수와 진보 간에 대결이 첨예한데도 보수와 진보에 대한 정확한 개념을 파악하려는 시민적 노력이 그간 부족했다. 심지어는 보수는 보수대로, 진보는 진보대로 서로가 ‘보수’와 ‘진보’라는 용어에 정확한 개념을 잘못 알고 있기도 했다. 보수와 진보에 대한 개념 정리가 정치•사회적 측면에서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야 시민들이 보수와 진보의 실체를 완전히 파악할 수 있다. 보수와 진보에 대한 시민적 함의(含意)가 선행돼야 새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내세우는 개혁이 구호에 그치지 않고 성과를 얻을 수 있다. 정부도 보수와 진보의 명확한 개념을 정리하고 그 본질을 깨우치지 않는 한 개혁의 정책의지는 방향감각을 잃기 쉽다.

진정한 보수는 개혁을 적극 추진한다. 개혁을 하지 않는 보수는 그것이 보수가 아니라 수구(守舊)다. 마찬가지로 보수성향이 없는 진보주의자는 진보주의자가 아니라 단순한 포퓰리스트(인기영합주의자)에 지나지 않는다.

흔히 개혁은 진보주의자가 하고 보수주의자는 개혁에 반대한다는 인식을 많이 갖고 있다. 이건 아주 잘못된 인식이다. 개혁의 목적은 전통의 좋은 점을 시대에 맞추어 새로운 모습으로 재창조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보수주의자나 진보주의자 모두가 그들이 진정한 보수주의자이고 진보주의자라면 당연히 개혁적인 성향을 나타낸다. 또 보수적 성향을 갖고 있어야 진정한 개혁을 추진할 수 있다. 왜냐면 보수성향은 개혁의 새로운 기준을 마련하고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항상 진보만을 외치는 개혁은 기준을 잃기 쉽다. 개혁의 원본을 제대로 그려낼 수 없어서다. 그래서 보수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진보주의자는 그가 진보주의자가 아니라 단순히 인기에 영합하는 포퓰리스트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

한편으로 개혁에 항상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보수주의자가 아니라 수구주의자들이다. 진보 쪽에 포퓰리스트가 준동하고 있듯이, 보수 쪽에도 수구주의자들이 숨어 있다. 따라서 우리는 당연히 보수주의자와 수구파를 분별하는 한편 진보주의자와 포퓰리스트도 구분해야 한다. 이런 상관관계를 혼동해서 보수주의자는 무조건 수구이고, 진보주의자는 무조건 진보인 것처럼 생각하는 건 오류다.

또 하나 지적하고 하는 건 우익은 항상 보수주의자들이고 좌익은 항상 개혁주의자들이라고 치부하는 경향이다. 이 것 역시 오해에서 비롯된 잘못된 생각이다. 진정한 보수는 개혁을 외면하기는커녕 오히려 적극 추진한다. 좌파세력에서도 변화를 거부하는 수구주의자들이 많다. 우리나라의 경우 맹목적인 김일성주의자들이나 교조적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철지난 이념에 빠져 시대적 변화를 무시하거나 거부하는 독선을 고수 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보수냐 진보냐가 아니다. 그 시대가 요구하는 이상을 어떻게 발전시키고 사회를 개혁하느냐가 중요하다.

지난 십 여년 동안 우리나라 정치 현안의 화두는 단연 “개혁”이라는 용어다. 군사정권은 말할 것도 없고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조차 정권이 들어서기만 하면 개혁을 강조했다. 이를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그렇게 부르짖으면서도 개혁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아이로니가 성립된다.

개혁은 혁명과 다르다. 혁명이란 기존 정치•사회 시스템을 완전히 뒤엎는 급속하고 과격한 변화다. 개혁은 기존 시스템을 온존시키면서 정치•사회적 시스템을 발전적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변화다. 즉 정치•사회 부문의 주요 시스템이나 제도, 그리고 시민의식과 행태를 변화시켜 나가는 게 개혁의 궁극 목적이다. 특히 오늘날 범세계적인 가치관이 변화와 다양성(다원화), 그리고 기술혁신이라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이상, 우리나라의 국가적 개혁 방향도 이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따라서 이런 간단없는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개인은 물론이고 사회, 국가 전체가 변화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변화에 대응하자면 먼저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생각과 의식이 그 이전과 달라져야 한다.

개혁이 완성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통념이 달라지고 행동양식이 바뀌어져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개혁 내용이 국민 정서와 조화되고 융합되어야 한다. 국민 정서와 조화롭게 융합하려면 개혁 내용이 국민 정서와 맞아야 한다.

따라서 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시일이 걸린다. 그러므로 개혁은 일발성 이벤트가 아니라 범국민적 의식의 장정(長征)이다. 중국의 등소평 개혁은 70년대에 시작해서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고, 프랑스 드골의 개혁은 그의 정치 후계자에 의해 계승되었고, 영국의 대처 수상 개혁은 재임 11년 동안 줄곧 이뤄졌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개혁이 불행히도 개혁의 개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서 국가적 사업이 아니라 단발성 이벤트적 행사로 치부해 성공하지 못했다. 김영삼 정권의 금융실명제가 그랬고, 김대중 정권의 전 국민의 카드소지화가 그랬다. 노무현 정권은 김대중 정권의 국민 편가르기를 개혁대상으로 승계한 웃지 못할 희극을 연출했다.

개혁은 일회성 단막행사가 아니다. 국민 모두가 동참하고 인식을 같이 하는 범국민적 의식개조사업이요, 중장기적 사회발전사업이다. 이 개혁에 개인적 편견이나 정권 차원적 이해가 개입되어서는 사업이 성공할 수 없다. 이명박 정부도 이런 개혁의 중요성과 당위성을 깊이 인식하고 정권적 차원을 넘어서 국가적 차원의 개혁을 이뤄내길 바란다.

이타임즈 최재완 편집인 [choijw47@etime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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