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키워드] 수치와 후안무치-대통령과 최순실씨의 뻔뻔스러움

입력 2016-12-22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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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숭호 언론인, 전 코스카저널 논설주간

우리 대통령과 최순실은 국회의 탄핵소추 내용과 검찰의 공소내용을 전부 부인했다. 한 인물이 같은 사안에 대해 수치심을 보이다가 후안무치로 돌아섰다. 세 번의 대국민 담화에서 자기가 한 짓을 부끄럽고 창피해하며 수치스러워하던 대통령은 헌법재판소에 보낸 답변서에서는 “모든 범죄는 최순실 개인 비리이고 나는 몰랐다. 최씨의 1심결과를 본 뒤에 탄핵 여부를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내가 뭘 잘못했나? 다 잘해보자고 한 건데”라는 말을 이렇게 한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런 뒤집기와 뻔뻔스러움, 후안무치는 최씨도 마찬가지. 50여 일 전 검찰에 나올 때는 “죽을죄를 지었다”더니 19일 첫 공판에서는 11가지 혐의 모두 부인했다. “독일서 왔을 때는 어떤 벌이든 받을 생각이었지만 이젠 확실한 사유를 밝히겠다”는 법정 발언은 ‘혐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대통령과 최씨는 분노를 불러일으키려 작정한 것이다. 진작부터 대통령을 미워했던 사람들의 증오는 더 깊어졌다. ‘대통령이 잘못한 게 없진 않지만, 그래도 대통령인데 체면은 지킬 수 있도록 해줘야지 않나’라며 그동안 속에 화를 눌러뒀던 사람들의 분노를 돋우기에도 충분했다. 이들은 “이런 사람을 대통령이라고 우리가 모셨던 게 수치스럽다”고 말했지만 ‘그래도 대통령이 수치심은 덜 느끼도록 해줘야지 않나’라며 대통령에 대한 비난은 삼갔던 사람들이다. 대통령의 부끄럼 모르는 답변은 이들을 격분시켰고, 최씨의 혐의 부인은 거기에 기름을 부었다.

수치심을 격분으로 격화시킨 이야기는 영국 소설가 살만 루슈디의 소설에도 나온다. ‘악마의 시’라는 작품에서 이슬람을 조롱했다는 이유로 1980년대 말 이란의 신정(神政) 지도자 호메이니가 전 세계 이슬람교도에게 ‘죽여라’고 명령했던 바로 그 소설가다.

그는 이 작품 외에 ‘한밤의 아이들’ ‘광대 샬리마르’ ‘불만’ ‘무어의 마지막 한숨’ ‘하룬과 이야기 바다’ 등 수많은 작품에서 ‘실존하기 어려운, 환상 속 인물 같은’ 캐릭터를 여럿 창조해 냈다. ‘수치’의 본질을 파헤치기 위해 쓴 ‘수치’라는 제목의 소설에서는 ‘수치심이라고는 모르는 남자와, 아들을 바랐던 부모에게 딸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집안의 수치로 여겨진 여자라는 상반된 인물’을 창조해 대립시키고 있다.

▲1차 공판준비기일에 참석하기 위해 19일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서고 있는 최순실. 사진공동취재단
▲1차 공판준비기일에 참석하기 위해 19일 서울중앙지법으로 들어서고 있는 최순실. 사진공동취재단

이 소설에서 아버지는 본 적도 없이 자신을 키우는 세 자매 중 누가 진짜 어머니인 줄도 모르면서 수치심을 못 느끼도록 자라난 남자, 즉 후안무치의 남자 오마르 샤이암은 어릴 때 열병을 앓아 백치가 됐지만 수치심을 느끼는 수피아 지노비아와 결혼한다. 이들이 구도가 매우 복잡한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루슈디는 백치인 지노비아를 수치심을 느낄 뿐 아니라 자신에게 수치심을 심어주는 사람의 목을 부러뜨려 죽게 하는 괴물로 변하도록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무심결에라도 남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하지 마라’라는 걸 소설적으로 변형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김선형 번역으로 ‘열린책들’에서 나왔는데 출판사의 책 소개에는 “자신의 수치와 모욕을 그녀에게 떠넘긴 자들에 대한 수피아 지노비아의 분노는 그녀를 누구도 멸시할 수 없는 자존감과 힘을 지닌 존재로 거듭나게 하고, 오마르 하이얌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동경하고 사랑한다”라는 구절이 등장한다. 그러나 오마르 역시 지노비아에게 죽임을 당한다.

루슈디가 오늘날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소재로 ‘수치’를 다시 쓴다면 어떻게 쓸까. “백치도 창피를 당하면 분노가 치솟고 이를 참지 못해 살인까지 저지르는데, 대통령의 수치를 덜어주기 위해 자신은 수치를 감당하려던 선한 사람들이 대통령의 후안무치에 격분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당연할 것이다”라는 내용은 들어갈 것 같다.

하지만 루슈디는 새로운 인물 창조에 더 욕심을 내지 않을까? 수치와 후안무치, 두 가지 성격을 동시에 발현할 수 있는 인물을 만들려는 욕심 말이다. 어렵지는 않을 것이다. 대통령의 헌재 답변서와 최순실의 공소사실 부인을 보고나면 그는 천재적 상상력으로, 새로운 환상적 사실주의, 마술적 리얼리즘이 가득한 소설 한 편은 어렵지 않게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소설은 ‘한국 사회는 후안무치한 존재들이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들을 다 죽이는, 그래서 뻔뻔하게 사는 것이 효율 높고 가치 있는 생존의 무기’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을 것이다.

‘수치’는 오늘날 파키스탄이 된 인도 땅에서 태어난 루슈디가 1971년부터 1977년까지 파키스탄 총리였던 줄피카르 부토(1928~1979)와, 그를 군사 쿠데타로 축출한 독재자 지아 울 하크 장군(1924~1988)을 모델로 한 인물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소설 속의 정치적 사건도 이 두 사람의 실제 관계가 바탕이다. 수치를 느끼면 가녀린 몸에서 괴력을 뿜어내 무자비하게 복수를 했던 백치 수피아 지노비아는 독재자 지아 울 하크 장군이 모델인 라자 하이더 장군의 장녀로 돼 있다. 부토 총리는 1979년 지아 울 하크에 의해 처형됐으며 이 과정과 여기에 얽힌 음모도 소설에 상세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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