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주의 키워드] 선동(煽動)-‘설득’은 시간 낭비다

입력 2016-12-08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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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코스카저널 논설주간

‘반지의 제왕’에 버금가는 환상소설 ‘나니아 연대기’를 쓴 영국 작가 C.S. 루이스(1898~1963)는 ‘순전한 기독교’ ‘공포의 문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등 대중을 위한 기독교 사상서도 많이 썼다. 이 중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는 악마학교 교장이었던 ‘스크루테이프(Screwtape)’가 영국에 파견된 제자 악마 ‘웜우드(Wormwood)’에게 젊은 지식인을 무신론자로 머물게 하는 방법을 31통의 편지에 써 보내 가르치지만 결국에는 실패한다는 내용으로, 2차 대전 중에 나왔다. 편지는 영국 일간지 가디언에 한 달간 연재됐다.

아래 글은 선동학교 교장이 한국에 파견된 제자에게 보낸 편지다. 며칠 전 꿈에서 (기억나지 않는) 누가 내게 보여줬는데, 첫눈에 스크루테이프의 맨 처음 편지처럼 써보려고 했음을 알 수 있었다. 단지 흉내를 낸 것이어서 깊이는 없지만 몇 줄은 그럴 듯해 그것들만 정리해 여기 옮겨보기로 했다.

사랑하는 제자에게,

네가 맡은 나라가 또다시 몹시 어수선하고 혼란스러워졌다는 소식은 들었다. 큰 공을 세울 기회를 맞았으니 맡은 바 열심히 할 줄로 믿는다. 너는 이미 그곳에서 여러 차례 대선과 총선 때마다 능력을 발휘하지 않았니? 거기 사람들이 쉽게 선동에 넘어가는 경향이어서 일이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겠지만 워낙 선거가 자주라 네가 힘들어 하는 건 잘 안다.

어쨌든 이번에도 거기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판단을 흐리게 해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못하도록 한다면,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바, 지금의 혼란이 유지되도록 한다면 네가 그렇게 바라는 승진과 함께 좀 편한 곳-그런 곳이 있는가 모르겠다만-으로 전보 발령을 내줄 것이야.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쓴 루이스는 1947년 9월 8일 ‘타임’의 표지 인물로 뽑히기도 했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쓴 루이스는 1947년 9월 8일 ‘타임’의 표지 인물로 뽑히기도 했다.
우리의 기본전략과 원칙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자꾸나. 우선, ‘설득’은 우리의 과업이 아님을 잊지 않았겠지? ‘확실한 사실을 증거를 바탕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설득’과는 달리 ‘선동’은 ‘사실이 아닌 것들을 사실인 양 믿도록 부추기는 것’ 아니냐? 설득에 시간을 낭비하지도 말고, 선동을 더 그럴 듯하게 보이게 한답시고 설득하려는 척도 하지 말기를 당부하련다. 엉성한 증거와 논리를 내세웠다가는 금세 탄로가 난단 말이야. 전과는 달리 거기 사람들도 종편이다, 페이스북이다, 블로그다 해서 자기네끼리 이것저것 주고받아서 아는 것이 엄청 많아지지 않았냐. 설득하려는 것들은 겉멋이 든 게지.

‘선동’이 먹히도록 하려면 ‘우울한 현실’을 계속 보여주어야 해. 우리의 목적은, 무엇보다, 네가 앞잡이로 삼은 자, 말로는 국민을 위한다면서 사실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파당의 이익만을 좇는 자들이 자기편을 많이 만들어 정권을 잡도록 하는 것 아니냐? 그러려면 정치인들을 포함한 기득권의 공고화, 재벌의 탐욕, 중산층 몰락, 청년실업, 고령화 등 눈앞의 정치·사회·경제적 불합리를 지속적으로 언급하도록 해야 할 것이야.

비전과 미래를 위한 로드맵? 급할 거 없어. 나중에 보여줘. 만들 수 있다면 말이야. 당장은 공격만 하라고. 거칠고 무자비하게. 그럴수록 사람들은 열광하며 우리 편이 된다고. 우리 편이 안 된 자들은 ‘그들’이라고 불러 편을 나눈 후 공격해! 달콤하고 아련한 향수도 불러일으켜 봐. 네가 이미 경험했으니 효과도 잘 알고 있겠지.

우울하고 한심한 현실을 고치겠다는 말을 함부로 하지 마. 무수히 많은 방법 중 어느 것이 최선인지는 누구도 확신하지 못하는데, 불쑥 “내가 고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가는 역공을 받기 쉽지. 적들도 그런 방법을 제시하고 논쟁하는 데는 오랜 경험이 있잖아. 자칫 논쟁에 말려들면 역풍을 맞을 수 있어. 모처럼 잡은 기회를 잃게 되고 막바지에 몰린 적들은 회생의 교두보를 마련하게 되지.

현실의 우울함을 과장하는 방법은 우리의 앞잡이들이 이미 잘 알고 있으니 따로 가르칠 필요는 없어. ‘관념’을 많이 동원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군. 혁신, 개혁, 진보, 평등, 자유, 민주 같은 단어를 최대한 자주 쓰라고. 이상하게도 거기 사람들은 먹고사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으면서도 이런 단어에 크게 매료된 것 같아. 아마 ‘이상(理想)’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오래된 풍조 때문인 것 같은데, 오죽하면 칼라일이라는 영국 학자가 “이상을 척도로 현실의 낡은 산물을 재지 마라”고 했겠냐. 이상은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 이상인데, 그걸 달성하려 애쓰는 인간들이 안타까웠던 모양이지.

어쨌든 비참한 현실, 우울한 현실은 언제나 선동의 불쏘시개임을 잊지 말아라. 루슈디라는 소설가가 말했듯 ‘대가리도 많고 아가리도 많은 대중이라는 괴물’을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려면 그 불쏘시개를 계속 공급해야 해. 하지만 “정치인은 민중이 하자는 대로 하다가는 그들과 함께 죽고, 그들을 거스르다가는 그들 손에 죽는다”는 말도 있더구나. 신복룡이라는 그곳 원로 정치학자가 쓴 글에 나오지. 그렇다고 우리의 임무, 선동꾼을 길러내는 일을 게을리해서는 안 됨을 명심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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