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버지로부터 상징적으로 물려받은 물건은 1966년에 발행된 ‘한국대표문학전집’이다. 한 권이 지금 책 세 권 두께만 한 그 열두 권짜리 문학전집은 내 서재 가장 아랫자리에 터줏대감처럼 자리 잡고 있다. 내 어린 시절 아버지와 형들이 읽고, 내가 자라며 읽은 책이다.
그리고 또 하나 어머니가 쓰던 물건이 있다. 지금 내 서재 한쪽에 아주 예전에 할머니가 쓰시고, 어머니가 쓰시던 물레가 놓여 있다. 나는 내 어린 시절 돌아가신 할머니가 베를 짜고, 물레를 돌리고 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길쌈을 하고 물레를 돌리고 베를 짜던 어머니의 모습은 중학교 때까지 보았던 것 같다. 그때로부터 불과 한 세대가 지났는데, 내 서재의 물레를 보고 저것은 무슨 물건이냐고 묻는 나와 같은 세대의 사람들도 많다. 도시에서 자란 사람들은 더더욱 모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봄이 되면 할아버지는 어느 논 한 귀퉁이엔 왕골을 심으시고, 또 어느 밭 한 귀퉁이에 삼을 심으셨다. 요즘도 이따금 사회적으로 문제가 되고 논란이 되고 있는 대마초가 바로 삼잎이다. 그것이 밭에서 여름내 사람 키보다 더 웃자란다.
어느 가을날 할아버지가 지게를 지고 가서 왕골을 잘라오고, 또 삼을 잘라온다. 왕골은 겨우내 할아버지가 그것으로 자리를 매고, 삼은 베를 짜기 전 할머니와 어머니의 소일거리가 된다. 삼을 잘라오면 잎들은 모두 잘라서 버리고 삼 줄기를 가마에 찐다. 그런 다음 껍질을 벗겨낸다. 그때까지도 삼 줄기는 거무칙칙한 색이다. 그 삼 껍질을 겨우내 집집마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가늘게 실처럼 찢어 가닥가닥 이어 붙인다. 그것을 ‘삼을 삼는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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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은 할아버지가 할머니 쓰라고 만들어주신 물건이다. 그걸 다시 할머니가 어머니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다 베를 더 이상 짜지 않게 된 다음엔 오래도록 광 속에 넣어두었던 물건이다. 베틀과 또 베를 짤 때 소용되는 여러 가지 물건이 함께 있었는데, 그것은 모두 어느 시기에 없어지고 이것만 남았다. 할아버지가 자리를 짤 때 쓰던 자리틀과 가마니틀도 비슷한 시기에 없어지고 말았다. 그것들도 지금 보관하고 있다면 불과 몇 십 년 전의 물건이지만 참으로 진귀한 물건으로 대접받을 것이다.
어머니가 딸도 아닌 아들인 내게 저 물레를 주신 뜻은 길쌈을 할 때 한 올 한 올 실이 헝클어지지 않게 저 물레에 감기듯 그렇게 술술 실을 뽑듯 글을 쓰라는 뜻이었다. 말하자면 무언의 격려이고 응원인 셈이다. 그러나 재주가 출중하지 못해 내 글은 실을 뽑듯 술술 나오지 못하고 늘 힘든 산고를 거친다.
저 물레는 이제 내 곁에 30년 가까이 있으면서 이제까지 내가 쓴 책을 모두 지켜본 셈이다. 어머니처럼 물레가 내 작품을 지켜보았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저 물레는 내 글을 응원하고 격려하는 어머니의 또 다른 모습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