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은행 본점의 한 경영기획 부서에는 총 7명의 부서원 중 대리급 이하 직원이 없다. 부장을 포함해 차장 3명, 과장급 3명이 구성원의 전부다. 이에 지난해 승진한 책임자급인 막내 과장 K씨가 온갖 허드렛일을 전담하고 있다.
B은행 수도권 지점에서 부지점장만 5년째인 P부장. 과거 2~3년이면 지점장 승진이 예고됐지만 현실은 너무 달랐다. 그는 인사 적체가 심각해 퇴직도 고려하고 있다. 그러나 ‘헌신짝 취급 당하는 기분이 든다’는 선배의 말에 임금피크제는 이미 그에게 관심 밖이다.
![](https://img.etoday.co.kr/pto_db/2014/12/20141223101143_560740_580_410.jpg)
은행권의 인력적체 현상이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다. 모바일뱅킹 등 IT서비스 기술의 발달로 지점 수는 줄고 있지만 인력 규모에서는 수년째 대동소이하다. 영업력 강화와 수익성 개선을 위해 인력 구조조정이 불가피하지만 노조 설득, 해고비용 등 때문에 그럴 수도 없다.
은행원들이 ‘은행의 꽃’으로 불리는 지점장 자리를 차지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지난 10년간 국민·신한·우리·하나·외환·SC·씨티은행 등 국내 7대 은행의 과장~부장급 중간 간부 비중은 행원 등 비관리자급보다 월등히 높았다. 지난 9월 기준 이들 은행의 직원수는 7만5084명으로 이 중 4만명이 과장 이상 책임자급이다.
이렇듯 책임자급 비중이 높아지면서 은행들은 인건비 부담과 생산성 하락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총이익 대비 인건비 비중은 2011년 25.7%에서 지난해 33.1%까지 오른 상태다.
은행원 노령화도 심각한 수준이다. 그동안 인력 구조조정을 단행했지만 올 3분기 기준으로 은행원들의 평균 근속연수는 수년째 변함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10년 전보다 2년가량 근속연수가 연장돼 노령화가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은행별로는 조기통합을 놓고 진통을 겪고 있는 하나은행과 외환은행 직원 간 평균 근속연수가 외환은행이 17년9개월으로 가장 길었던 반면 하나은행은 12년4개월로 가장 짧았다. 두 은행의 근속연수가 무려 6년 가까운 차이를 보였다.
국민은행은 유일하게 직원들의 평균 근속연수가 2개월 줄었다. 올해 초 4200명에 달하는 계약직 인력을 정규직으로 전환한 결과다.
문제는 은행들이 인사적체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다는 점이다. 은행들은 임금피크제를 적용받는 직원의 전직을 지원하는 등의 방안을 고민 중이지만 비용문제 등 노조와의 타협점을 찾기 어렵다.
7대 시중은행이 올해 3분기까지 임직원들의 명예퇴직 등에 사용한 해고급여(명퇴금)가 3250억원에 이르고 있다. 1년 전 1915억원보다 58%나 급증한 규모다. 상반기 임금피크제가 적용돼 구조조정으로 빠져나간 인력들에게 쥐어준 해고급여가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한국씨티은행이 점포 30% 가량을 줄이고 대대적인 인력 구조조정에 나선 결과다. 씨티은행은 기존 190개 점포 가운데 56개(29.5%)를 통폐합하고 영업구역을 서울과 부산 대구 대전 인천 광주 등 전국 6개 주요 도시로 좁혔다. 희망퇴직 인원만 600명 이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은행들의 경우 노사 합의를 하고도 고비용으로 인해 희망퇴직 규모를 축소하고 있다. 그러나 직원들 입장에선 정년은 보장되지만 만 55세에 연봉이 깎이는 임금피크제보다, 몇 년치 월급을 받고 회사를 떠나는 희망퇴직을 선호한다.
임금피크제에 들어가도 마땅히 하는 일이 없어 눈치만 보게 된다는 점에서 희망퇴직을 부추기고 있다. 한 은행 임금피크 적용 직원은 “전표 검사 등 후선 업무를 주기는 하지만 단순하고 반복적인 노동”이라며“ ‘임피’라는 딱지 때문에 후배 눈치도 봐야 하고, 고객들에게 무시당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를 방증하듯 올해 외환은행에서 임금피크제를 적용받은 인원 총 119명 중 은행에 남겠다고 밝힌 은행원은 7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112명은 모두 회사에 특별퇴직을 신청했다. 하나은행도 임금피크제 대상은 총 149명이며 이 가운데 100여명 이상이 희망퇴직을 택했다.
은행권에서 인력적체 현상 돌파구로 도입했던 임금피크제도가 철저히 외면당하고 있다. 현재 금융노조에 소속된 금융사는 총 36곳이다. 이 가운데 16곳이 임금피크제를 도입했고 나머지 20곳은 임금피크제를 운용하지 않고 있다. 은행 18곳 가운데 신한·농협·한국SC·한국씨티·대구·부산·제주·수협 등 8곳은 임금피크제를 도입하지 않았다.
한편 올해 금융기업의 임금·단체협상이 난항을 거듭하고 있다. 오는 2016년부터 정년을 기존 만 58세에서 만 60세로 연장하는 이슈를 두고 노사 간 입장 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