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세 백혈병 아동과 불일치…수여자 변동돼
혈액 중 약 1%…혈액암 등 난치성 질환 완치
2세 준비 중 찾아온 소식…적극적 공가 지원
대한민국 자본시장의 모든 돈이 모여서 가장 치열한 숫자 경쟁이 벌어진다는 여의도. 삭막하기만 한 이곳에도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내어주는 것을 넘어, 꺼져가는 생을 되살린 이가 존재한다.
이규원 키움증권 리스크관리부문 파트장(39)이 그 주인공. 몇 달 전 이 씨는 자신의 조혈모세포를 시한부 선고를 받고 생사의 갈림길에 놓여있던 한 혈액암 환자에게 기증했다.
이 씨가 조혈모세포 기증 희망을 등록한 것은 2008년 7월 군 전역 직후. 의무소방대로 군 복무를 했던 그는 119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을 방문할 일이 많았다. 이 과정에서 혈액 또는 신체 일부가 부족해 생의 끈을 놓아야 하는 사람들을 다수 접했고, 이들을 도울 방법을 찾고 싶었다.
전역하자마자 각막과 장기 기증 등록을 통해 이러한 결심을 곧장 실행에 옮겼다. 또 정기적으로 헌혈의 집을 방문해 헌혈하면서 조혈모세포에 대해 알게 됐다. 그는 "사후 기증인 각막, 장기와 달리 조혈모세포는 살아생전에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기증을 결심했다"고 했다.
빠른 결정에도, 일치자는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일치자를 찾았다는 연락을 받은 것은 그로부터 15년 넘게 시간이 흐른 2024년 어느 봄날이었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 점심식사를 마치고 사무실 자리에 앉아서 평소보다 조금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처음에는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서 '무슨 무슨 은행'이라고 하길래 제가 증권사에 근무를 하고 있어서 같은 금융권인 은행에서 연락이 온 줄 알았다. 알고 보니 한국조혈모세포은행협회였다"라며 "제 조혈모세포가 백혈병을 투병 중인 3세 아동과 일치한다고 했다"고 회상했다.
조혈모세포는 정상인의 혈액에서 약 1% 정도 존재한다. 전체 혈액 내 비율은 낮지만, 백혈구, 적혈구, 혈소판 등 우리 몸에 필요한 모든 혈액세포를 만들어내 '어머니 세포'라는 의미에서 이름이 붙었다. 백혈병, 혈액암, 재생불량성 빈혈과 같은 난치성 혈액 질환을 모두 완치 가능하다.
성공적인 조혈모세포이식을 위해서는 환자와 기증자 간의 조직적합성항원(HLA)형이 일치해야 하지만, 일치 확률은 부모와 자식 간 5%, 형제자매 간 25%, 타인 간은 2만 분의 1인 0.005%로 매우 희박하다.
따라서 최대한 많은 사람이 조혈모세포 기증에 등록해야 일치자를 찾을 확률이 높아진다. 작년 말 기준 국내 전체 기증희망 등록자 수는 약 42만 명인 반면, 조혈모세포 이식 대기자 수는 6234명으로 기증희망자 수는 매우 부족한 실정이다.
이 씨는 "곧장 기증에 동의했지만, 추가 정밀 검진에서 3살 아동과는 불일치하다는 판정을 받아, 첫 번째 이식은 무산됐다. 대신 성인 중에 또 다른 일치자가 있다는 소식이 나왔다"라며 "중도에 수혜자가 변경됐지만, 결심에 변화는 없었다"고 말했다.
주위 사람들이 마냥 달가운 반응만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아버지와 장인어른께서는 '규원이 생명에 지장이 없는 일이라면 해봐라'하고 말씀하셨지만, 아내와 어머니, 장모님은 제 건강을 많이 걱정하셨다. 특히 2세를 준비 중이었기 때문에 걱정을 더 많이 하신 것 같다”라고 했다.
이어 "오히려 새 생명을 준비하면서 평상시 꾸준히 운동하고 건강관리에 힘써오던 차였기 때문에 기증에 더 적합했던 것 같다"라며 "사내 동료들도 처음에는 '가족 중에 누가 아프냐'고 했다가, 모르는 사람에게 기증한다고 하자 '뭘 그렇게까지 하냐'라며 의아한 반응이었다"고 했다.
그럼에도 이씨의 결심은 굳건했다. 다만 기증 및 이식 과정에서 업무 중간에도 수시로 시간을 내야하는 일은 번거로웠다. 사측의 적극적인 협조와 지원이 없다면 불가능한 부분이다. 그는 "다행히 회사에서 곧바로 공가 처리를 하고 편하게 다녀오라고 하셔서 저는 부담이 없었지만, 만일 제가 자영업에 종사했더라면 하루만 빠졌어도 매출 타격이 컸을 것"이라고 했다.
조혈모세포 기증자와 수여자의 HLA형 최종 일치가 확인되면 먼저 기증자의 건강상태를 확인하기 위한 혈액검사, 건강검진이 진행된다. 채취 3~5일 전부터는 뼛속에 있는 조혈모세포를 혈액으로 이동시키는 과립구집락촉진인자 주사를 매일 한 차례씩 맞아야 한다. 해당 절차마다 기증자와 코디네이터 간에 원활한 소통이 진행되어야 할 뿐 아니라 기증자가 병원을 오가야 할 일도 잦다.
장기이식법에 따르면 장기 기증을 위한 신체검사 또는 채취 등에 필요한 입원 기간에 대해 공무원은 병가로 처리, 사기업은 유급휴가로 처리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항은 권고사항으로 지켜지지 않는 사업장이 많다. 이에 등록자들은 일치자를 발견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밥벌이라는 현실에 떠밀려 기증을 철회하는 경우가 대다수다.
이 씨는 "실제로 조혈모세포 기증자들의 직군을 보면 비교적 휴가를 내기 수월한 공무원 또는 의료계가 많다고 들었다. 일정을 조금 빼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지만, 당일 채취 시간은 5시간 남짓이고, 기증 후 바로 퇴원 및 일상생활이 가능하다. 채취하는 혈액 양도 헌혈(350mL)보다 적다"며 "증권업계에도 조혈모세포 기증 문화가 더욱 확대돼 더 많은 기증자가 나오면 좋겠다"고 했다.
최근 조혈모세포 기증 문화는 증권가뿐만 아니라 전금융권으로 확산 중이다. KB라이프생명은 지난 6월 'KB라이프 생명나눔 챌린지' 캠페인을 열고 전 임직원을 대상으로 조혈모세포 기증 문화 확산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조혈모세포 기증은 만 55세 미만이면 누구나 가능하다. 기증 희망등록자의 나이가 55세가 되면 등록기관에 올라왔던 모든 개인정보는 자동으로 폐기된다.
끝으로 이 씨는 "등록기관에서 일치자를 발견하더라도 처음 기증 당시 등록했던 핸드폰 번호가 변경되면서, 연락이 닿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기증 이후 핸드폰 번호가 변경됐다면, 등록기관에 알려줘야 한다"라고 당부했다. 다른 생명의 품으로 자신의 조혈모세포를 떠나보낸 그의 혈액 속에는 '나눔'이라는 또 다른 세포가 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