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을 무시하라?!”…에르메스가 187년째 사랑받는 방법 [이슈크래커]

입력 2024-03-26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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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3일 서울의 한 백화점 앞을 시민이 걸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1월 3일 서울의 한 백화점 앞을 시민이 걸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명품에도 소위 ‘급’이 있다는 말, 심심찮게 들어보셨을 겁니다. 명품 브랜드들을 ‘접근성’을 기준으로 분류하는 건데요. 높은 가격, 비밀에 부쳐지는 판매 정책 등 ‘선뜻’ 사기 어려운 명품 브랜드일수록 ‘급’을 높게 평가하는 모양샙니다.

이 기준으로 명품 브랜드 중에서도 최상단에 위치했다는 평가를 받는 건 ‘에·루·샤’가 대표적입니다. 에르메스, 루이비통, 샤넬을 줄여 부르는 말인데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보복 소비 붐이 일면서 명품 소비가 급격하게 늘었고, 시장과 함께 이들 브랜드의 매출도 폭발적으로 성장했습니다. 당시 백화점 출입문 앞에는 돗자리, 접이식 의자, 텐트를 가져와 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오픈런’ 인파가 몰리기도 했죠.

최근에는 텐트까지 동원하는 오픈런 행렬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지금도 원하는 제품을 단번에 구매하는 건 어렵습니다. 재고가 넉넉하지 않기 때문인데요. 사실 이는 명품 브랜드들의 마케팅 전략 일환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제품 판매를 의도적으로 조절하는 건데, ‘에루샤’ 중에서도 이 같은 마케팅 전략으로 정평(?)이 나 있는 브랜드가 있습니다. 바로 에르메스죠.

▲2월 26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의 한 경매장에서 직원이 에르메스의 버킨 25 가방을 전시하고 있다. (AP/연합뉴스)
▲2월 26일(현지시간) 영국 런던의 한 경매장에서 직원이 에르메스의 버킨 25 가방을 전시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에르메스는 다른 리그에서 뛰는 명품”

에르메스는 1837년 티에리 에르메스가 프랑스 파리에서 설립한 브랜드입니다. 이때부터 패션 아이템을 만든 건 아니고요. 당시 교통수단이었던 마차를 끄는 말에 필요한 안장 같은 마구 용품 사업으로 포문을 열었습니다. 에르메스 로고에 말과 마부가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인기 제품 ‘켈리백’도 사냥을 나갈 때 마구를 넣던 큰 주머니 ‘새들 캐리어’(saddle carrier)가 시초입니다.

이때도 에르메스는 수준 높은 가죽 가공 실력으로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이후 자동차의 출현으로 여행산업이 성장할 것으로 예상한 에르메스 가문은 가방을 비롯해 벨트, 장갑, 옷 등 부티크 사업에 뛰어들었는데요. 가죽세공에 뛰어난 기술을 가진 장인들이 마구 제작과 동일한 기술과 기준을 가죽 제품에도 계승하면서 독보적인 품질을 보장하게 됐습니다.

에르메스가 긴 역사에 걸쳐 사랑받는 이유도 여기 있습니다. 에르메스의 제품은 아직도 장인들이 수작업으로 직접 제작합니다. 생산 단가를 낮추기 위해 제3국에서 기본 제작을 하는 다른 명품 브랜들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죠.

특히 에르메스의 대표 상품인 ‘버킨백’은 프랑스 장인들이 한땀 한땀 바느질해 만드는 가방으로, 가격이 최대 10만 달러(한화 약 1억3000만 원)에 달한다고 합니다. 이 버킨백은 에르메스의 뛰어난 가죽 세공 능력의 정수로 꼽히는 ‘새들 스티치’(saddle stitch)로 만들어지는데요. 새들 스티치는 올이 틀어지면 쉽게 뜯어지는 기계식 재봉과 달리, 바느질을 두 번 겹쳐 쉽게 풀리지 않게 한 박음질 방식입니다. 역동적인 말의 움직임과 지속적인 마찰을 견딜 수 있어서 에르메스는 이 방식으로 안장을 만들어 왔는데요. 가방·벨트·장갑·시곗줄 장식 등 제품 전반에 사용하면서 에르메스의 상징 중 하나가 됐습니다.

새들 스티치처럼 정교한 디테일을 고려하면, 한 명의 장인이 일주일에 두 개도 못 만든다는 버킨백의 희소성도 납득이 간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합니다.

▲1월 2일 서울시내 한 백화점 앞을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1월 2일 서울시내 한 백화점 앞을 시민이 지나가고 있다.
에르메스 지난해 순이익 28% ↑…가격도 잇달아 인상

글로벌 경기 침체 등으로 전 세계 명품 시장은 최근 수요 둔화에 따른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에르메스는 다릅니다.

로이터, AFP,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에르메스는 2월 9일(현지시간) 지난해 순이익이 43억 유로(약 6조2000억 원)로 전년보다 28%, 매출은 134억 유로(19조2000억 원)로 21% 올랐다고 공시했습니다. 지난해 4분기 매출은 33억6000만 유로(4조8000억 원)로 전년 동기 대비 18% 증가하며 예상치(14%)를 웃돌았죠.

에르메스 매출은 전 지역에서 성장했으며, 코로나19 이후 회복이 더딜 것으로 전망됐던 중국에서도 선전한 것으로 파악됐습니다.

가장 큰 시장인 일본 등 아·태 지역의 작년 매출은 75억 유로(10조8000억 원)를 기록했는데요. 일본은 전년 대비 매출이 15%, 나머지 아·태 지역은 13%의 성장률을 보였다고 합니다. 유럽과 미주의 매출 성장률은 각각 19%, 17%였습니다.

악셀 뒤마 에르메스 회장은 이날 실적을 발표하면서 올해 세계적으로 가격을 8∼9% 올릴 계획이라고 발표했는데요. 앞서 에르메스는 지난해에도 생산비용 상승을 이유로 가격을 약 7% 인상한 바 있습니다. 당시 국가별 인상률은 미국은 3%였지만, 일본은 환율 변동으로 인해 두 자릿수에 달했죠. 가격 인상에도 호실적을 달성했다는 건데, 가격 인상이 소비자의 명품 구매 욕구를 꺾지 못한 겁니다.

로이터 통신은 에르메스가 클래식 디자인과 함께 세심한 생산·재고 관리에 힘입어 고가 브랜드 중에서 가장 꾸준한 성과를 유지하고 있다고 설명했고, JP모건체이스는 “에르메스는 다른 리그에서 뛰고 있다”는 평가를 내놨습니다.

▲에르메스의 버킨백. (출처=에르메스 공식 인스타그램)
▲에르메스의 버킨백. (출처=에르메스 공식 인스타그램)
“비밀의 방으로”…에르메스 ‘디마케팅’에 소비자 뿔났다

그러나 에르메스의 성장세가 제품의 ‘질’ 덕분만은 아닙니다. 마케팅 전략도 에르메스를 명품 중 명품으로 만드는 데 공을 세웠죠.

에르메스는 전 매장을 직영으로 운영하면서 고객 수를 의도적으로 줄이고 제품 판매를 철저히 통제하는 ‘디마케팅’ 전략을 구사합니다. 수요를 억제하면서 제품의 희소성을 유지하고 브랜드의 ‘이름값’을 견고히 다지려는 취지죠.

최고 인기 라인인 버킨백, 캘리백은 연간 구매 한도가 2개로 정해져 있어 ‘쿼터(quota)백’으로 불립니다. 나머지 ‘아더(other)백’은 6개까지 살 수 있는데, 문제는 가방을 사려면 벨트, 스카프, 신발 같은 비인기 제품을 수천만 원어치 사들이면서 ‘실적’을 쌓아야 한다는 겁니다. 명품업계에서는 통상 버킨백이나 켈리백을 손에 넣기 위해 소비자가 에르메스 국내 매장에서 써야 하는 돈을 5000만~1억 원가량으로 보고 있습니다.

실적을 쌓았다고 모두가 인기 가방을 구매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실적은 ‘구매 자격’ 중 하나일 뿐, 판매 여부는 에르메스 측이 정합니다. 구매 대기 명단에 이름을 올리더라도 실제 제품 구매까진 몇 년을 기다리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에르메스의 ‘VVIP’들에게 먼저 선택권이 주어지는 탓이죠.

에르메스는 연간 생산량이나 실적 기준을 공개하지 않습니다. 이에 온라인 커뮤니티, SNS 등지에는 원하는 제품을 보다 빠르게 획득할 수 있는 팁들이 전해지기도 하죠. ‘에르메스 비밀의 방 가는 법’ 등의 제목으로요. ‘비밀의 방’은 셀러의 안내를 받아 구매 전 제품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을 일컫는 말인데요. 에르메스는 여기까지의 과정이 특히 까다로워 “셀러 한 명만 정해서 많이 사라”, “여러 번 만나서 좋은 이미지를 각인해라” 등 조언이 나돌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에르메스의 전략에 최근 소비자들이 폭발했습니다. 살 사람 가려서 파는 에르메스의 ‘갑질’을 참지 못한 미국 소비자들이 ‘독점금지법 위반’이라며 집단소송을 제기한 건데요.

영국 가디언 등에 따르면 미국 캘리포니아 소비자 2명은 “에르메스가 버킨백을 판매할 때 해당 소비자가 충분히 ‘가치 있는’ 고객인지 선별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캘리포니아 북부 연방지방법원에 집단소송을 제기했습니다.

이들은 소장에서 버킨백을 온라인으로 구매할 수 없으며 오프라인 매장에도 제품이 전시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는데요. 에르메스 판매 직원들이 버킨백을 사려는 소비자에게 자사의 신발, 스카프, 액세서리 등 다른 아이템 구입을 조건으로 제시한다면서 “버킨백의 엄청난 수요와 낮은 공급은 에르메스에 강력한 시장 지배력을 제공하고 에르메스는 이를 이용해 소비자에게 자사의 다른 제품을 구매하도록 하는 ‘묶음 판매’(tying)를 한다. 이는 독점금지법 위반”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다만 소송에서 이기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기도 합니다.

스텔라 매카트니, 레그앤본 등 패션 브랜드와 함께 일하는 뉴욕의 더글러스 핸드 변호사는 뉴욕타임스(NYT)에 “법이 ‘묶음 판매’(tying) 여지를 어느 정도 허용한 상황”이라며 “‘묶음 판매’의 정의가 다소 비정형적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문제의 품목이 필수품일 경우 이런 판매 행위가 법에 위반된다는 판결이 나올 가능성이 더 높다. 이를테면 약을 판매하는 제약회사의 경우”라고 부연했죠.

이번 소송이 에르메스의 명성(?)에 별다른 해를 끼치지도 않을 것으로도 예상됩니다. 에르메스 등 명품 브랜드들은 가격 인상에 대한 불만과 동물 학대 등 숱한 논란에도 매년 실적 상승세를 기록하는 게 현실이기 때문인데요. 에르메스는 새해가 밝기 무섭게 신발 제품 가격을 최대 44% 올리더니, 이후 인기 가방 제품들의 가격도 10~15% 인상하기도 했습니다. 결혼 혼수 상품 수요가 증가하는 본격적인 봄철에 접어든 만큼, 명품업계는 추후로도 에르메스를 비롯한 명품 브랜드들의 가격 인상 릴레이가 펼쳐질 수 있다고 전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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