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정민이 절창의 연기를 보여준 이웅평 상위(우리 공군의 대위)는 1983년에 북한에서 전투기를 몰고와 삽시간에 남한을 전쟁 직전 혼돈의 도가니로 만든 주인공이다. 당시 라면을 먹다가 공습 사이렌을 듣고 온 가족이 사색이 되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영화 마지막에 태국에서 벌어진 대한민국 대통령 암살 사건은 실제로 같은 해 버마(지금은 미얀마) 아웅산 국립묘지에서 고위 공무원과 기자들이 사망했던 대형 테러 참극을 모사한 것이다.
영화는 조직에 침투한 내부 스파이를 색출하는 이야기인데 안기부 해외팀 박평호(이정재)와 국내팀 김정도(정우성)가 서로를 의심하고 감시하며 얽힌다.
영화는 스타들의 ‘숨은그림찾기’라는 즐거움을 준다. 한 편의 주연을 해도 되는 배우들이 대사도 없는 역할을 맡아 스쳐 지나간다. 김남길, 주지훈, 박성웅, 조우진 등이 그렇다. 관객들 사이에 김남길이 어느 장면에 나왔는지 서로 물어본다. 무엇보다 우리는 꽤 괜찮은 감독 한 명을 이 영화에서 건졌다. 한국 영화사에 특급 배우가 특급 연출자가 된 경우는 내 기억에 없다. 이정재는 이 작품의 각색, 연출, 주연을 맡았다. 이정재는 최고의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배우이자 능력 있는 연출자가 된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있다.
영화가 첩보 액션의 직진을 보여주더라도 감정의 휴식과 또 다른 감성이 쌓일 시간이 필요하다. 쉬어가는 장면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정재 감독은 오랜 시간 영화를 해왔다. 호흡을 고르는 장면이 자칫 연출의 약점으로 보일까 하는 심리적 강박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잠시 멈춤(PAUSE)이 없다면 관객이 인물의 감정에 이입하기 쉽지 않다. ‘과다 서사 장전 후 몰아치는 연출로 연속 격발’이라 평했던 누군가의 글이 생각난다. 적절한 지적이다.
한국 현대사의 굴곡진 현장은 역설적으로 콘텐츠 서사에 무궁한 보고와 같다. 아직도 소재가 될 만한 사건들은 차고도 넘친다. 어느 누가 먼저 역사의 소재를 밝은 눈으로 보고 멋진 스토리텔링으로 만들어 낼지 앞으로도 흥미롭게 지켜보자.
박준영 크로스컬처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