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도 소통, 저기도 소통이 유행하는 한국 사회를 두고 저자는 ‘소통강박 사회’라고 명명한다. 다수가 믿어 의심치 않는 주제에 대해 딴죽을 거는 것이 이 책이 가진 매력이다. 문학 특기자 면접장에서 참가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독자와 소통하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바람을 털어놓는다. 대다수는 “좋다”고 답하고 말겠지만 작가는 “문학이 무슨 수화도 아니고 왜 소통에만 집착을 하는 것일까”라고 의문을 제기한다. 그런 의문에 대한 하나의 해답으로 작가는 관객과 소통하지 않았지만 예술과 소통한 하길종이란 감독 작품을 예로 든다. 그는 잠시 반짝하지는 않았지만 오랫동안 남는 작품을 냈다.
청춘을 위로하기에 분주하던 때가 있었다. 받는 사람이나 하는 사람이나 대다수는 위로를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저자의 이야기는 다르다. 처음부터 청춘은 구조적으로 고단한 시기가 될 수밖에 없고 40대에는 20대와 비교할 수 없는 진짜 고생이 온다고 힐링 열풍에 찬물을 확 끼얹고 만다. 매년 60만명이 졸업해서 이 가운데 10퍼센트가 전문직이 되고 10퍼센트가 대기업에 들어갈 수 있다. 한마디로 12만명이 그럭저럭 괜찮은 삶을 산다. 나머지 48만명이 상위 20퍼센트에 밀려 열등감을 갖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구조에서 어떻게 삶이 고단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시니컬하다고 평할 수 있지만 오히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나면 살길이 나올 수 있다. “한없이 이어지는 검은 터널과 언제 끝날지 모르는 시지프스의 고난이 쌍으로 달려드는 지랄 악몽 같은 시기가 청춘이다. 아, 제목은 청춘예찬이 아니로 청춘애찬(靑春哀讚).”
한국 사회를 ‘불평을 조장하는 사회’라고 정의하는 저자는 다수 의견에 반대되는 주장을 펼친다. 그 이유에 대해 대다수 사람들은 이것이 문제이고 저것이 문제라는 주장을 펼칠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완전히 딴판이다. “인류가 탄생한 이래 단 한 번 이뤄져 본 적이 없는 평등하고 공평한 세상을 마치 금방이라도 실현할 수 있는 것처럼 떠들어대는 무리 때문에 세상 꼴이 이 모양이다.”
이런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 가운데는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는 독자들에게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친구들에게 속지 않도록 정신을 단단히 차리라고 하면서 “잘못된 세상을 진단하고 바꾸려는 노력과 허언(虛言)으로 불평과 핑계를 조장하는 것은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밝힌다.
책 속에는 이런 문장이 등장한다. “기성세대는 능력 밖의 일을 해주겠다고 나서지 말아야 한다. 부추기지도 말고 있지도 않은 희망이 저 산 뒤에 있다며 위기를 모면하려 들지도 말아야 한다.” 나는 문뜩 기성세대에게만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아니라 특별히 정치인에게 해 주고 싶은 이야기이라고 말하고 싶다. 다수가 늘 옳은 것은 아니다. 때로 다수는 본성에 따라 눈이 가려질 수가 있다. 세상의 통념과 다수 의견에 속지 않고 늘 깨어 있는 방법은 현명하게 사는 법이자 성공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