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의 엘리엇’ 먹잇감 노리는데… 국회는 경영권 방패 뺏기 [쓰나미 막을 뚝, 포이즌필]②

입력 2024-06-24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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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세지는 해외 투기자본 습격
22대 국회 상법개정안 잇단 발의
집중투표제‥감사위원 분리 선출
헤지펀드도 감사위원 선임 가능
외국 투기세력 ‘입김’ 세질 우려

▲그래픽=손미경 기자 sssmk@
▲그래픽=손미경 기자 sssmk@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을 위한 주주총회 표대결을 이틀 앞둔 2015년 7월 15일, 수요 사장단 회의가 열린 삼성전자 서초사옥은 긴장감이 감돌았다. 당시 윤용암 삼성증권 사장은 “투기펀드라고 지칭되는 엘리엇과 대결하기 위한 첫 번째 싸움”이라며 “투기자본의 행태가 한국에서 통하지 않는다는 좋은 선례를 남기고 싶다”고 강조했다. 삼성물산은 소액주주들에게 “자신의 투자와 한국경제 발전, 자본시장 흐름에 도움이 되는 결정을 해주길 기대한다”며 호소한 끝에 합병에 성공했다. 예상치 못했던 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공세에 합병이 무산되고 경영권까지 뺏길 뻔했다. 이후 경영계에서는 해외 투기자본들의 ‘제2 엘리엇 사태’를 막기 위해 경영권 방어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쏟아졌다.

하지만 만 10년이 되어가는 현재, 당시 거론됐던 방어책은 어느새 잊힌 지 오래다. 지난 국회에 발의된 경제 법안들은 소 잃고 외양간을 고치기는커녕 오히려 더 부수는 꼴이라는 지적까지 나온다. 2003년 소버린, 2006년 칼 아이컨, 2015년 엘리엇을 차례로 겪었지만, 현실은 그대로다.

잊혀진 포이즌 필

삼성전자의 외국인 지분은 55.8%로 올해 들어 최고치를 연이어 경신했다. 시가총액 2위 SK하이닉스의 외국인 지분율은 지난 13일 처음으로 56%를 넘어섰다. 현대차의 외국인 지분율은 41%로 2019년 12월 이후 4년 5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최근 10년간 국내 상장사의 외국인 지분 평균은 30% 수준이다. 삼성전자처럼 투자 가치가 상대적으로 높은 10대 그룹 계열 상장사는 평균 30% 선을 오르내린다.

기업의 성장을 위해 외국인 지분이 늘어나는 것 자체는 긍정적이다. 그러나 외국인 주주들이 만족하지 못할 경우, 단순투자목적으로 갖고 있던 지분을 무기로 바꿔 경영권을 위협할 수도 있다. 2006년 칼 아이칸이 KT&G에 대한 적대적 인수·합병(M&A) 시도 당시, 단순투자로 지분을 갖고 있던 프랭클린 뮤추얼이 투자목적을 경영참여로 변경하면서 아이칸과 손을 잡았던 사례도 있다.

전문가들은 외국 투기자본에 맞서 기업이 경영권을 방어할 최소한의 장치는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미국 구글이나 메타 등 글로벌 기업 창업주들의 1주는 10표의 의결권을 갖는다. 미국·일본·프랑스 등은 차등의결권과 같은 경영권 방어 장치가 있다. 일본은 2005년 ‘신주예약권’으로 이름 붙인 일본식 포이즌 필 제도를 도입했다. 미국 역시 소더비, 허츠, JC페니 등 많은 기업이 포이즌 필을 경영권 방어에 활용하고 있다.

국내의 경우 현재로서는 자사주를 늘려 지배력을 스스로 강화하는 것이 유일한 대응책이라는 게 재계 관계자의 설명이다. 한국경제연구원은 엘리엇 사태가 벌어졌던 2015년 당시 보고서에서 “국내 우량기업에 대한 외국인 지분율이 급속히 증가하면서 투기자본에 의한 적대적 M&A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면서 “이를 방어하기 위해 포이즌 필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익명을 요구한 법조계 한 교수는 “포이즌 필 제도는 기업 가치 유지와 일반 주주들의 이익 극대화에 효과적”이라며 “다만 지배주주나 경영진의 사적인 이익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지 못하도록 적법성 판단 기준을 명확하게 설정해야 하고, 사전적·사후적인 통제 장치가 효율적으로 작동하도록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소 잡아먹고 외양간 더 부수자

“아~ 테스형. 기업환경 왜 이래. 왜 이렇게 힘들어~. 아~ 테스형. 소크라테스형. 규제법안 또 왜 저래~.” 한국경제인협회(옛 전국경제인연합회)가 2020년 12월 홈페이지에 올린 만평이다. 가수 나훈아의 노래 ‘테스형’을 개사한 글로, 그림 속 소크라테스는 곤란한 표정을 짓고 있다. 당시 여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이 경제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기업규제 법안을 밀어붙이는 상황을 묘사했다. 22대 국회에서 야당인 민주당이 절대 다수당이 되면서 이런 우려가 다시 소환되고 있다. 기업의 경영권을 위협할 수 있는 법안들이 무더기 발의되면서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제22대 국회 개원 이후 이달 들어 발의된 상법 개정안은 총 9개다. 가장 대표적인 법안은 이사의 충실의무 관련 상법 개정안이다. 현행법은 이사가 회사를 위해 그 의무를 충실하게 수행해야 한다고 규정한 부분에 ‘주주’를 추가하는 게 골자다. 이사의 충실의무 대상에 ‘주주의 비례적 이익’을 추가하거나(정준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안), 대상에 ‘총주주’를 추가해 주주에 대한 보호 의무를 부여하는 내용(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안)이다.

또 차규근 조국혁신당 의원은 사업보고서 등 주요서류를 주주총회 소집통지일에 통지·공고하고 주총 안건 찬반비율 공고를 의무화하는 상법 개정안을 냈다. 강훈식 민주당 의원도 상장회사의 전자투표 실시를 의무화하는 내용을 발의했다. 그밖에도 주식 병합 시 병합 사유와 비율을 사전에 통지하도록 하고, 분할 합병 신설회사에는 신주 배정을 금지하도록 하는 경영계가 반대했던 법안들이 대거 국회에 올라왔다.

이런 상법 개정안이 국회 문턱을 넘을 수 있다는 점은 경영계에 부담이다. 범야권이 국회 3분의 2 가까이 의석을 차지한 상황에서 합심해 모든 법안을 처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 일부 의원들은 △소수주주 동의제도 △권고적 주주제안 △집중투표제 △감사위원 분리 선출 △다중대표소송제 도입 등 내용을 담은 입법을 추진할 예정인 것으로 확인됐다.

특히나 집중투표제나 감사위원 분리선출 등이 시행되면 몇몇 헤지펀드가 뭉쳐 감사위원을 선임할 수 있어 외국 투기세력의 입김이 세질 수 있다. 일반 이사보다 권한이 많은 감사위원은 재무 등 회사 경영과 관련한 중요한 부분도 들여다볼 수 있다.

경영계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한경협 관계자는 “소버린 사태, 엘리엇 사태 등 비슷한 상황을 여러번 겪고도 경영권 방어장치가 제대로 없는 상황”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기업을 옥죄는 상법 개정안이 대거 통과되면 국내 기업은 외국 투기세력의 놀이터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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