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현로] 공공기관장 임기제 만능 아니다

입력 2023-05-30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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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병 정치평론가

▲박상병 정치평론가
▲박상병 정치평론가
안팎으로 사퇴 압박에 시달렸던 한국전력공사 정승일 사장의 사표가 지난 18일 수리됐다. 전기요금 인상에 앞서 25조7000억 원 규모의 자구안 발표와 함께 사의를 밝힌 지 엿새 만이다. 물론 사퇴는 예정된 수순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정 사장이 이임사를 읽으면서 수차례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했다는 소식은 많은 사람들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사퇴 자체가 아니라 거기까지의 압박과 갈등, 모욕, 비하 등의 회한이 그만큼 컸을 것이다. 정 사장인들 항변하고 싶었던 얘기가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럼에도 권력관계 변화라는 태풍 앞에서 사장 자리의 남은 임기를 셈하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하다.

한전을 비롯한 공기업 사장들의 임기는 대체로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28조)’에 따라 3년으로 규정돼 있다. 그리고 1년 단위로 연임할 수 있도록 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지만, 그 임기가 대통령 임기와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데서 오는 모순이 핵심이다. 그렇다고 해서 대통령 권력과는 무관하게 ‘정치적 독립성’을 강하게 주장할 대목도 많지 않다. 결국, 공기업은 행정부의 일원이며 동시에 정부 정책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는 점에서 최소한 정무직만큼은 대통령 임기와 같이 가야 한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 있다. 그것이 ‘책임정치’의 기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공기업 사장의 임기를 법으로 규정하고 있는 현행 제도는 당초 임기제 도입의 취지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권력에 휘둘리지 말고 공공의 이익을 위해 소신껏 직무를 수행하라는 것이 임기제 도입의 배경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그 권력을 삼권분립처럼 대통령 권력과는 무관하게 소신껏 직무를 수행하라는 뜻으로 해석한다면 이는 과잉이다. 특히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하고 있는 우리 헌법 취지에도 어긋난다. 대통령은 정책과 비전, 가치 등을 놓고 국민의 선택을 받아 새 정부의 청사진을 마련한다. 그럼에도 최일선에서 정부 정책을 구현해야 할 각 공기업 사장들의 남은 임기 때문에 새 정부의 국정과제 수립이 차질을 빚고, 심지어 사장들의 임기가 끝나길 기다려야 한다면 이는 어불성설이요, 혈세 및 시간 낭비다.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공공의 이익과도 배치된다. 따라서 누구를 위한 임기제인가 물어도 할 말이 없는 대목이다.

이번에 논란이 된 한전을 비롯해 대부분의 주요 공기업들은 정부 정책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따라서 정부가 바뀌었을 때는 새 정부를 중심으로 공기업의 업무 내용과 방향, 목표 등이 재조정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라고 정권을 교체하는 것이다. 그 핵심 역할을 각 공기업의 사장들이 맡고 있는 셈이다. 물론 정권교체의 성격에 따라 각 공기업의 정책 방향이나 비전이 새 정부와 전혀 다른 경우도 있을 것이며, 큰 변화가 없는 곳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정권 재창출의 경우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정권이 바뀌었을 때는 공기업 사장들의 경우는 새 정부에 먼저 재신임을 묻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것이 대통령 중심제를 채택한 권력구조의 성격에도 부합한다. 정부 정책이야 어떻든 아직 임기가 남았다며 버티거나 ‘정치탄압’ 운운하며 새 정부와 싸울 일은 아니라는 얘기다.

언제까지 공기업 사장들의 임기를 놓고 소모적인 정쟁을 반복할 수는 없는 일이다. 관행이나 상식에 맡기기엔 정치 현실이 너무 냉혹하다. 그렇다면 이번 기회에 법으로 원칙을 재정립하는 것이 옳다. 당장 여야가 합의할 수 있는 해법은 간단하다.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28조)’의 일부 조항만 개정하면 된다. 먼저 대통령 임기와 공기업 사장의 임기를 맞추는 것이 제일 좋다. 임기를 현행 3년에서 2년으로 줄이고 일 년 단위로 연임토록 하면 된다. 동시에 새 정부가 출범할 때는 남은 임기와 관계없이 재신임을 받도록 하면 된다. 그래야 새 정부도 임기 초부터 국민과 약속한 정책과 목표, 비전을 역동적으로 펼쳐나갈 수 있다. 그리고 정권이 바뀔 때마다 되풀이되는 이른바 ‘알박기’ 논란도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 있다. 가능하면 내년 총선 전에 여야 합의로 처리하는 것이 옳다. 시기를 놓치면 다시 소모적 정쟁만 가열돼 국정운영의 차질은 물론 국민의 피해로 전가될 수밖에 없다. 임기 말 ‘알박기’에 성공한 공기업 사장 외에는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임기제 명분의 ‘자리 지키기’는 우리 공직사회의 부끄러운 밥그릇 싸움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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