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서울 구로구 디큐브아트센터에서 최재림을 만났다. 최재림은 "대한민국 라이센스 작품 중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역사가 깊은 '시카고'를 함께 하게 됐다"며 "배우 개인으로서도 '잘 왔다'는 자부심이 든다"고 했다.
뮤지컬 '시카고'는 1920년대 미국 쿡 카운티에서 실제로 벌어진 공판을 배경으로 한다. 재즈의 열기와 냉혈한 살인자들이 만연하던 시대를 풍자한 작품이다. 최재림은 박건형과 함께 시카고 최고의 인기 변호사 빌리 플린 역을 맡았다. 빌리는 능청스럽고 뻔뻔한 연기로 주인공 벨마 켈리(최정원·윤공주), 록시 하트(아이비·티파니 영·민경아)만큼 존재감을 드러낸다.
"저는 '시카고' 공연을 매 시즌 봤어요. 볼 때마다 참 맵시 있고 섹시한 공연이라고 생각했어요. 그 공연의 맛을 지금 느끼고 있네요. 관객 앞에서 할 때마다 매번 전율 넘치고 짜릿합니다."
'시카고'의 무대는 특별한 장치 없이 심플 그 자체다. 무대 중앙에서 14인조 라이브 밴드가 연주하는 재즈 넘버에 맞춰 배우들이 관능적인 매력을 뽐낼 뿐이다. 다소 단출할 수 있는 배경이 오히려 '시카고'에 출연하는 배우를 돋보이게 한다. 타냐 나디니 연출이 '손가락 끝까지 스토리텔링 할 것'을 배우들에게 주문한 것도 이 때문이다.
"연출께서 모든 춤, 음악, 대사에 최대한 진실로 접근하라고 하셨죠. 화려하고 관능적인 안무가 많이 나와서 '짠짠짠' 할 수 있는 공연일 수도 있지만, 그냥 공연해선 안 된다는 거죠. 최소한의 세트 위에서 아주 단순한 의상을 입고 하기 때문에 더욱 디테일이 드러나는 것 같아요. 굉장히 도전적이기도 하지만, 그런 부분이 재밌어요."
최재림은 1970년대 만들어진 뮤지컬 '시카고'가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흥행하기 시작한 원인에 대해 스스로도 고민했다. 그가 찾은 작품의 롱런 이유는 "'시카고'가 변하고자 하는 내용을 관객이 동의하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조금씩 변하고 있지만, 코어는 변하지 않잖아요. 세상엔 다양한 부조리들이 있는데 주어진 환경 속에선 보지 못하죠. 그런데 무대 위에 그런 면들이 꺼내지고, 확대된 모습으로 보이니 생각할 지점들이 생겨요.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전부 개인적이고 이기적이고 욕망에 충실해요. 그래서 정을 주기 어렵죠. 미운 사람만 계속 나오는 공연이 될 수도 있고요. 하지만 오히려 그런 면들이 너무나도 솔직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거기에 매료되는 것 같아요."
최재림은 빌리 플린과 자신의 닮은 점은 '직업 정신'이라고 했다. "빌리는 재판에서 이기는 것과 이기기 위한 방법을 강구하는 것을 좋아하며, 기자들 앞에서 의뢰인을 변호하고 대변하는 것을 좋아해요. 자기 일을 사랑하고 즐기는 거죠. 개인의 인성을 떠나서 그런 면은 비슷한 것 같아요."
최재림은 치열한 경쟁률을 뚫고 빌리 플린 역을 따냈다. 이 과정에서 멘토인 박칼린의 도움도 받았다. 박칼린은 배우로, 음악감독으로 '시카고'에 참여한 이력이 있다.
"박칼린 선생님께선 노래를 멜로딕하게 부르지 말라고 하셨어요. 빌리의 넘버는 자기 뜻을 관철하는 내용이 담긴 만큼 굉장히 힘 있고 강한 주장을 해야 한다고요. 빌리의 노래가 브라스 팝이나 브라스 재즈 같은 노래로 들릴 수 있거든요. 넘버에 접근하는 방법 자체를 바꿨죠."
관객들은 최재림이 보이는 빌리 플린의 강점을 '완벽한 복화술'이라고 말한다. 그의 복화술 실력은 연습실 공개 당시에도 호평을 받았는데, 이후 언론공개회 때 더 업그레이드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덕분에 그가 나온 'We both reached for the gun' 넘버의 조회 수는 100만에 달한다.
"원리만 알면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에요. 잔재주일 뿐인데, 극 중에서 많이 돋보이나 봐요. 다른 연기를 더 잘해야 하는데. (웃음) 원리요? 입술을 최대한 붙이고 사전에 공간을 만들기 위해 입을 양옆으로 늘린 상태에서 혓바닥은 입 안쪽에서 움직인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ㅁ'이랑 'ㅂ','ㅍ'처럼 입술이 맞닿아야 나는 발음은 어쩔 수 없이 입을 움직여야 해요. 그걸 숨기기 위해 입술을 가까이 붙이는 것도 있어요. 이것만 알고 10~15분만 거울 보고 연습하시면 돼요. 저희 '시카고' 캐스트 정원 선배, 경선 누나, 경아, 티파니 다 잘해요."
요즘 자신을 향한 칭찬에 몸 둘 바 모르겠다는 최재림이지만, 그는 고민 지점은 따로 있었다. 다름 아닌 '전달력'이었다. 빌리 플린 역할을 맡은 배우는 한 번 입을 떼면 멈출 수 없다. 문장도 길고 호흡도 빨라서 자칫 훅 지나가 버릴 수도 있다.
"속도감은 있고 템포는 끌고 가되 뜻이 최대한 전달되도록 하려 해요. 제가 어떤 의도로 말하는지, 이 문장이 뒤에 나올 문장과 어떻게 연결되고 어디로 가는지 가장 많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시면 안 되니까요. 대신 의상 체인지는 없어서 편해요. 제가 역할에서 입었던 의상 중 가장 현대적이고 포멀한 의상이에요. '아이다' 때는 옷을 아예 안 입혀주셨잖아요." (웃음)
지난해 최재림은 뮤지컬 '아이다', '렌트', '킹키부츠', '에어포트 베이비', '젠틀맨스 가이드'에 출연했다. 여기에 '로또싱어' 1위와 '복면가왕' 가왕이라는 수식어까지 얻었다. 개인적으로도 만족스럽고 뿌듯한 해였다. 특히 '캐릭터에 한계가 없다'는 관객들의 평이 가장 행복했다는 그다.
최재림은 앞으로 영역을 조금씩 넓혀가고 싶다는 계획도 드러냈다. 자신과 잘 맞는 역할이라면 무엇이든 해보고 싶다고 했다. "영화 '내부자들'에서 조승우 선배님이 하신 역할처럼 생각을 많이 하는 캐릭터를 해보고 싶어요. 표정으로 연기하지 않아도 많은 생각을 하는 게 보이는 역할이요. 한국판 '시카고'의 빌리 플린 역할도 좋을 것 같아요."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최재림에겐 무대가 기본값이었다. 그는 '삶의 연장선'이라는 말로 무대에 대한 애정을 표했다.
"무대는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씻고 운동하든 친구들을 만나 커피를 마시거나 집에서 혼자 티브이를 보는 것과 같은 거예요. 극장에 가고 무대 위에 서고 다른 인물이 돼서 동료들과 연기를 하고 집에 돌아오는 것 안에 열정과 행복이 있습니다. 제 인생에서 무대라는 공간, 무대라는 개념은 사라지지 않을 거예요. 계속 같이 가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