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갓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흔붓이 흘리고 있다…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효석(1907.2.23~1942.5.25)의 대표작 ‘메밀 꽃 필 무렵’에 나오는 봉평에서 대화까지 80리 길 묘사 중 한 장면이다. 분명히 소설인데 시인 것 같기도 해 경계가 모호하다. 김동리는 이런 그를 두고 “소설을 배반한 소설가”라고 말한 적이 있다.
농익은 우리말 어휘가 시인의 언어를 떠오르게 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암시와 복선을 깔고, 독자의 상상에 맡기는 결말은 1930년대 작가라고 하기에는 너무 세련됐다. “1930년대 우리 문단에서 가장 참신한 언어 감각과 기교를 겸비한 작가”라는 평가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그가 처음부터 이런 서정적인 소설을 쓴 것은 아니었다. 초기엔 사회성 강한 작품을 주로 썼다. 그러다가 혼인을 하고 생활이 어려워져 총독부에 취직한다. 주위의 지탄이 쏟아졌고, 결국 처가가 있는 함경도로 가 농업학교 영어교사로 부임한다. 생활이 안정되자 경향(傾向) 문학의 요소를 털어내고 순수 문학을 추구한다.
이효석의 문학 세계는 ‘향수 문학’이라는 말로 대변된다. 시인 정한모가 그것을 잘 정리했다. “하나는 어린 꿈의 요람지인 고향에 대한 혈연적 향수(메밀꽃 필 무렵)이며, 또 하나는 현대문학의 발생지인 구라파에 대한 현대 문학권 내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의 향수(낙엽을 태우며)이고, 또 다른 하나는 현대문명 속에 일그러져 가고 있는 인간들이 그 시달림 속에서 일그러지지 않았던 상태의 인간상을 찾고자 하는 에덴적인 것에 대한 향수(분녀)이다.”